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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l 05. 2016

깊이에의 강요

 감자와 천착

햇감자를 찐다. 

알맞은 크기의 감자를 깨끗이 씻어서 소금을 약간 뿌린 후 압력솥에 담는다. 

예전에 큰올캐가 오빠를 따라 강원도에 가서 살 때 

이웃사람들과 햇감자를 쪄먹었는데 

전라도식으로 감자의 껍질을 벗기지 않고 쪄서 사람들 앞에 내 놓았단다. 

그 때 사람들의 눈이 아주 휘둥그레졌다는 다분히 설화적인 이야기가 

감자를 찔 때 마다 생각난다. 

껍질을 벗겨서 찐 감자와 

껍질 채 찐 감자가 뭬 그리 다르다는 말인가?

조삼모사나 그보다도 더 안 되는 우선순위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사소한 부분에 경악했다고 한다. 

(약간의 놀람을 경악으로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조금 다르다 하여 그게 그리 휘둥그레 할 일인가,

다름에 대한 반응으로 내게 각인된

그러나 사소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감자를 찔 때 마다 인식되는

감자에 대한 나만의 역사이다. 

나도 당연히 껍질 채 감자를 찐다. 

껍질 벗기기가 귀찮기도 하지만

찐 감자를 벗기면 나타나는 속살거리는 하얀 모습이 좋아서이다. 

가볍기 그지없는 껍질 속에 우아하게 포진하고 있는 희디흰 속살, 

가슴 어여쁜 여인들의 가슴골 같은 속살, 

먹음직스럽고 탐스럽기 그지없다.  

뜨거운 감자를 살짝 베어 물면 달거나 시지 않는, 

자극이라고는 없는 밋밋한 그 맛이 뭉근하게 퍼진다.

분분粉粉인 듯, 그러나 함께인, 순식간에 입맛을 지나 몸과 합일하는, 

탄수화물의 자존감이 팽배한 맛이라고나 할까,  

감자의 맛을 살펴보면

깊이는 단순히 크기나 넓이 깊이에 비레한 것이 절대 아니라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얇고 심심한 맛이 지닌 깊이는 

깊음에 있지 않고 스스로에게 있다고 해야 맞겠다.

감자 뿐일까?

갓난 아이들의 의식 없는 행동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깊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반응일 뿐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사랑스러움을 안다면

<깊이>에 천착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깊이 없음은 쓸쓸하다. 

가령 여행을 같이 간 친구가

남편과 헤어진 후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고 

느낀 적이 없었던 감정에 대한 고백을 했다. 

우연히 친구와 함께 있다가 그 친구를 아는 남자가 다가 왔는데...... 

같이 술을 한잔 하면서 술을 마시지 않는 대신 

술에 대한 암송시를 그녀 읊었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 그녀는 우리에게 그 시를 읊어 주었다.

다른 친구들은 그 시가 절묘하다며 박수를 쳤는데 

나는 그 시가 주는 엷음(약간의 가벼움 경박함 천박함등)과 

그러나 그 엷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분위기에 꼭 맞는 

그래서 감동하게 되는 상황에 주목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와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읊은 엷은 시가 일으키는 감적의 기폭은 

듣는 그에게도 읊은 그녀에게도 깊고 커서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하지 못할 행동, 

께끼 손가락을 걸고 한참을 걸었다는, 

우리나이 또래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대로라면 

유치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냈다는 것이다. 

엷은 시라서 이루어내는 아우라가 

깊고 그윽한 어떤 시보다 더 승했다는 이야기처럼 내겐 보여졌다. 

그러니 깊이는 어쩌면 단어 그대로 깊이에 있지 않고 

가변적인 상황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그녀와 함께 둘러본 제천의 의림지는 그냥 평범한 호수였다.

시시하네......

그런데 그 호수가 사람들의 농업을 삼한시대부터 도왔다는 글을 읽는 순간

그 긴 시간의 축이 순식간에 내게 다가와 

삼한시대? 

가만 그렇다면...... 

감동에 젖게 하며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의림지 순간에 변했으니 

결국 사물에 대한,

대상에 대한, 

<깊이>를 느끼는 감도는

대책없는 주관적인 내 안의 척도일수도 있다.  

의림지 저쪽 끝으로 가보니 거기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꽤나 깊어 보이는 계곡이 

자리하고 있었다. 

숨을 훅 들이켰다. 

그 깊이(?)로 인하여.^^*  

파트리크 쥐스킨트 아주 짧은 소설

‘깊이에의 강요’를 보면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분한

‘깊이’가 주인공이다.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젊은 여인은 

<깊이>라는 무기를 지닌 평론가에 의해 살해된다.

그녀는 자살하지만 그 자살은 분명코 살해다. 

재능도 있고 마음에도 와 닿는데 깊이가 없다는 평론가의 말에 

사람들은 동화하고 그녀는 일순 <깊이>없는 화가가 된다. 

사람들은 그녀의 <깊이>에 대하여 주절거린다.

아 좋은데.... 그런데 뭔가 깊이가 없지요?

그녀의 <깊이 없음>을 아는 것이 

마치 자신의 <깊이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 처럼

(헤아릴수없이 무수한 우리들의오류 아닌가)

그녀 역시 자신의 그림 보다는 깊이에 천착하게 된다. 

그녀는 <깊이>에 의해 절묘하게 휘둘려지다가 

결국은 그 깊이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녀가 죽은 후 그 평론가는 그녀의 그림을 말한다. 

숙명적이고 무자비한 깊이에의 강요가 거기 있다고.....  

사실은 이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엄마가 화분에 심어놓은 완두콩 줄기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작은 손을 펼치고 매달아 놓은 가느다란 줄에 

자신의 몸을 엮어가며 자라가는 그 감동이라니.... 

물론 열매에 대한 연상작용도 없지 않았다.  

의림지 주변의 오래 묵은 적송의 거대한 모습도 아름다웠지만 

일년 초인 저 완두콩 줄기도 깊이 있는 아름다음을 향유하고 있으니 

깊이 타령 

이제 그 시시한 천착 

그만두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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