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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l 07. 2016

북한산계곡물귀경

나는,으로 시작한 글은 거의 촌스럽다

 나는,으로 시작한 글은 거의 촌스럽다....는 것은 아마도 나만의 편견일 것, 

편견일망정 분명히 내게 자리하고 있는 견해인데...

그래서 나는 글을 시작할 때 거의 나는, 이라는 시작을 안 하는데,

오늘  나는... 나는 이란 즉 나는,으로 글을 시작해볼까,

굳이 그 이유를 찾자면 아마도 정지돈 탓일 것. 

내가 싸우듯이 정지돈의 글을 읽고 있다고 지인에게 카톡을 했더니 

나에게 휴전을 하라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다른 이야기를 몇 번이나 주고받고 나서야 알았다. 

 아 정지돈의 글 제목이야... 했더니 아하, 무슨 내용의 글인데?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할 말이 썩 선명치 않아서 

 단편집인데...놀라워...새로운 시대 같아, 라며 얼버무렸다. 

내가 선명치 않다는 것은 책을 다 읽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이글들이 내가 익히 읽던 단편소설들과는 조금 궤를 달리해서...

그게 신세대인가 혹은 젊은이 라선가 혹은 새로운 철학인가? 남다른 글쓰기 법인가,..

 등등 종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또 다른 이유를 찾아보자면 나의 통찰력 저조 이해력 불가~ 가 주범이기도 하겠다.  

그림도 매일 새로워지는데 문학이라고 단편소설이라고  언제나 안주만 하겠는가...

그러고 보니 앙드레 브르통이 언제 적 사람인데 

그 옛날 사람을 마치 미래의 사람처럼 인식하고 있는 이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으로   

그의 글을 읽다가 손들고 다시 잡지 못하고 있으니.....

도무지 북한산 가는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당연히 헤맬 것 같아 

오직 보이는 길~~~만 가는 나의 방향치 길치 공간지각력 전무.....가

정지돈의 글에서도 혁혁한 공과를 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정지돈은 오히려 나를 퇴화시킨 것이다. 

너무나 <젊은내>가 폴폴 나서 쫓아갈 수가 없어서 

나는 오히려 더 늙고 촌스러운 척을 하고 싶었다.

(척, 이 아닌데~~)  

나는 오늘 물귀경이 하고 싶었다. 

구경은 단순한 젊음의 시선 이하는 짓이고 귀경은 나이라는 양념이 

'명동칼국수집김치속의마늘'처럼 듬쑥 들어간 단어이다. 

어젯밤 비가 내렸으니...오늘 북한산 계곡은 엄청  불어나 있을 것이다.

예측대로 북한산 초입에서부터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의 소리.

왜 저 커다란 물소리는 저렇게도 사무치게 가슴속으로 스며들어오는가.  

귀를 괴롭히는 무수한 소음들... 가운데서 우리는 살고 있다.

차의 클랙슨 소리는 안 할수록 세련된 운전자다. 

좁은 골목길을 가다가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는 분노까지 하게 한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엄청난 소음이다. 

넓고 높은 스타벅스 안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목소리에서 자유로운 대신

나의 목소리도 그만큼 커져야 한다. 

커피보다 소음을 마시러 가는 것 아닌가... 생각되어질 때도 있다.

아름다운 하모니의 노래도 몇 번이면 질리게 된다. 

오케스트라가 저렇게 커다란 소리 포르테시시모로 연주를 한다고 치자.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을까, 

그러나 흐르는 물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나의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로 높은 곳에서 혹은 함께 흐르며 내는 커다란 소리는

오히려 나를 고적하게 하며 나를 작아지게 하며 나를 경외에 젖게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포근하게 안기기를 원하는데

안김은 몸들끼리의 것만이 아니라  모든 것들과 가능한 유무형의 부드러움이다. 

그 안락함 속에 거하기 위하여 음악당을 가며 

독서를 하며 미술관을 찾는 것이다. 

나 아닌 것들이 나를 안아주기를 원하는 행위이다. 

사랑하는 이여 오늘도 우체국 창가에서 편지를 쓰나니.... 는 일도 그러하다.  

우체국 창가는 아니자만 이렇게 자판을 또닥거리는 것도 혹시 글이 나를 안아줄까....

글의 눈치를, 아니 글의 틈을 살피는 일이다. 

외로워서다.

기실 북한산 계곡에서 엄청난 소리로 흘러가는 혹은 흐르는 물처럼 외로울까, 

어쩌면 물이 지닌 커다란 외로움에 안기니 나의 외로움이 하잘 것 없어지는지도 모른다.

낙차... 가 있는 곳에서는 내가 바라보는 한 내내 희디흰 포말이 가득했다. 

물의 포말이 분분처럼  내게로 날아왔다.

물처럼 글을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물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며 내 곁에서 흘렀다. 

심상한 듯 여여한 듯 

숲을 오를수록 계곡의 물은 맑아졌고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숲의 계곡이 무수한 물의 갈래를 안고 흐른다는 것,

커다란 계곡 하나가 아니고 두어 개가 아니고  

수많은 물줄기들이 계곡을 향하여 연신 합하더라는 것, 

숲 사이사이마다 수많은 물줄기들이 생겨서 흐르고 있더라는 것,   

하다못해 숲 사이에 난 길조차도 세류가 되어 흐르더라니까, 

합하여 더하여 연하여 더불어~  함께!!,

어떤 줄기가 다가와도 무심한 척~~ 안더라는 것, 

커다란 돌이 가로막으면 가볍게 옆으로 비켜가더라는 것, 

야트막한 돌이면 사랑스럽다는 듯 만지며 그 위를 흐르더라는 것, 

길이 좁아지면 함께 가자.. 하며 큰소리로 세차게 흐르더라는 것, 

땅이 깊은 곳이면 그 깊음에 맞춰 물의 색도 검푸르게 변하더라는 것,

하얀 돌 위에 서면 하얗고 투명하게 바뀌더라는 것,

귀룽나무가 휘어져 물 가까이 다가서 있으면 귀룽나무처럼 그 아래서 

초록색으로 변하더라는 것, 

숲 그늘이 짙은 곳에서는 숲 그늘처럼.... 깊음을 담고 흐르더라는 것, 

무수한 여럿이면서 하나더라는 것,

하나이면서 무수한 여럿이더라는 것, 

알 수 없는 헤아림과 이해할 수 없는 몸짓을 지닌 스토리, 강렬한 지적 소양 앞에서 

무추름하던 나까지도 담쏙 안고 흐르더라는 것,      


   

몇 년 전만 해도 이 산영루는  돌터.. 돌기둥만 있었다. 시인 묵객들이  빼어난 자리에서 시를 읊었다고.... 오히려 나는 그 빈터가 좋았다. 정자 상상도 더 잘되었고 도포자락 휘날리는 묵객 연상도 더 잘되었다. 무엇을 위한 복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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