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영 Jul 29. 2020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파스칼 키냐르



낮게 가라앉은 구름 그 구름 사이로 언뜻 보이는 먼데 푸른 하늘 아주 조금, 

그러나 구름이 짙은 걸 보니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아요. 

습기는 싫어서 제습기를 자주 틀면서도

산사태가 난다고 조심하라는 빨간 스피커 문자를 받았는데도 

비를 기다리는 마음은 뭐랍니까,

새벽 세 시 넘어서 잠이 깼어요. 빗소리 때문에요.

비가 세차게 오니까 사위가 고요해선지 빗소리가 들려오더라고요. 

창문을 조금 열고 서서 사람 없는 거리에 비가 내리는 것을 한참 바라보았지요.

그렇게 깨면 잠이 쉬 들지 않아서 아예 책을 펼쳤습니다. 바로 곁에는 안대를 준비해놓구요. 

졸리면 안대 끼고 바로 자려구요.     


파스칼 키냐르의 책을 읽고 있어요. 

몇 년 전 부클에서 ‘세상에 떠도는 말들’을 읽을 때도 세네 권 함께 읽었는데 어제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를 빌리러 갔을 때 그 주변에 키냐르의 자그마한 책들이 있는 거예요.

‘떠도는 그림자들’을 펼쳐 봤는데 아무런 기억이 없어서 다시 빌렸고 ‘부테스’‘혀끝에서 맴도는 이름’등 

네 권을 빌렸어요. 두껍지는 않지만 페이지가 금방금방 넘어가지는 않는 글들이죠. 

모르는 것도 많고, 행간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오래 머물러야 할 때도 있고 

키냐르의 글은 마치 향기 짙은 커피를 입안에 잠깐 굴리고 천천히 목에 넘기듯 그렇게 머물게 해요. 

‘부테스’에서  “모든 음악은 느닷없는 호출”이란 문장 앞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죠. 

늘상 호출당하지 않는가요, 음악이 나를 아무 곳이나 아무 때로나 데려가지 않던가요. 

그것도 모자라 저 아득한 기억 속 시간으로 서슴없이 떠내려 가게 만드는데, 

음악의 호출이라는 단순한 문장을 쓰거나 생각해보지 않았다니,  

 음악으로 자유롭게 버무린 지극히 평범한 ‘호출’이라는 단어가 거대한 풍경이 되는거죠.  

정원은 읽었고(손에서 놓기 싫더군요) 오늘은 나머지 세 권을 슬슬 읽어가며 이글을 쓰고 있어요.

커피와 음악, 그리고 책과 날씨, 무엇을 해도 만족하지 못한 시간이죠.


실제는 그대의 안부를 묻는 글이기도 합니다. 

이제 편지는 사라지고 전화, 멜이나 카톡, 연락할 수 있는 짧고 굵은 방법들이 많지만 

그런 직접적인 방법을 쓰기에는 조심스러워서요.

그러고보니 단지 대상을 그대로만 했을 뿐이지 그대는, 

‘그대’로 형상화 된 나의 어떤 부분일지도 모르겠어요.    


작가 연보를 읽는 것도 나이 들어서 달라진 독서법의 하나예요.

전엔 부록처럼 스쳐 지나간 것들을 이젠 제법 꼼꼼하게 읽게 돼요. 

파스칼 키냐르가 ‘세상에 떠도는 말들’을 쓴 나이와 년도를 보는 거요.

작은 일들을 자세히 보는, 골격보다는 그 골격을 있게 하는 그 안의 것들을 바라보게 된 탓일까요,

아니면 맥락을 알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어요. 더 깊은 이해를 위한,  

이해하기 위한 일로 그의 삶을 연도별로 짚어보는 것요.

나이는 시절은 사회는......아ㅡ 죽기 전 몇 년이었겠구나, 마지막 작품이면....

이런 사소한 앎이 의외로 맥락의 키를 지니고 있기도 하거든요. 


부테스는 포세이돈이죠.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려 아르고호에서 바다로 뛰어든,

그가 노래하는 해변=홀리는 땅=귀환 차단 할 때 아프로디테가 그를 다이버의 원형으로 만든다구요. 

물에 빠지는 서사가 음악 속에서 이루어지는 여행을 하다 보면 

키냐르의 여행은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는 길을 데려가죠.   

바다는 통주저음이고 슬픔의 세계로 끝까지 갈 용기있는 자는 음악 뿐이라는, 

그 음악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단지 느낄 뿐이라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지만 마치 음악 자신이 음악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해요. 

<파스칼 키냐르는 아주 매혹적인 문체로 마치 스모선수가 상대방 허리춤 잡듯이 불끈 잡아서

밀어내듯 쓸 거예요. 타인을 굴복시키는.... 승리를 향한 문장이죠. 

아무도 쉬 바라볼 수 없는 무엇을 바라보는데, 

우리도 가끔 바라볼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글로 형상화 시키지는 못해요. 

키냐르는 원래 음악가예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아침이라는 글도 영화도 만들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 책, 빌라 아말리아의 주인공도 음악인이죠. 

피아노도 잘치고...무엇보다 곡을 쓰는데....그 곡들이 아주 단순해요. 

모든 너스레를 다 떼어 내버린....그래서 매우 어렵죠....

생각해보세요. 어떤 화가가 골격만 그려놓고 거기에 보는 사람마다 살을 입하라고 한다면

그렇게 어려운 그림 어디 있겠어요.

“음악은 악기의 도움 없이 내 안에서 만들어지죠. 고개를 똑바로 들고 거의 일어난 자세로 앞으로 내민 입안에서 상체의 모든 공간에서 말이죠. 음악도 오르가즘과 마찬가지로 머리 바로 위에서 생겨나는 거예요. 악기 앞에서 악기의 도움으로 악기를 위해 작곡된 곡은 하나같이 악기가 낼 수 있는 소리를 따르고 악기로 향하게 되는 탓에 더 이상 음악이 아녜요.” 

그녀의 음악은., 키냐르의 음악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빌라 아말리아를 읽고 난 뒤 쓴 글 중에서 조금 가져왔어요.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음악과 정원에 대한 글이에요. 

글을 읽으며 저절로 무대가 떠올려지는, 

주인공들이 무대 위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는 무대를 대하고 있는 듯한 글이예요. 

희곡적인 요소도 그렇지만 모든 희곡들이 무대를 떠올리게 하지는 않죠. 

극서은 감독거야, 저리 밀어놓고 글속으로 들어가는데

이상하게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독자가 무대를 만들어요.

간결하지만 우울한 무대 약간의 회빛이 비치는 무대. 주인공은 세사람인데

그 세사람 다 환한 옷은 안돼요, 

젊은 아내와 젊은 딸도 환해야하지만 옷으로는 안돼요. 

싱싱한 피부와 솜털만으로 환해야 해요. 

사랑이야기 같지만 절망에 대한 이야기죠. 

절망 만이 아니라 그 절망을 이겨나가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키냐르는 아주 오래된 사제가 쓴 

‘야생 숲의 노트’ 라는 책에서 이글을 발견해내요. 

로댕이 돌에 숨어있는 작품을 발굴해 내듯이,

<생명이 없는 사물에도 나름의 음악이 있다. 

수도꼭지에서 반쯤 찬 양동이 속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시라>

그러고 보네 제 딸아이에게서도 잊지못할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딘가를 산책 중이었는데 바람이 불어오니 바람의 키가 A쯤 된다고 말을 하더군요.  

 내 둔한 귀로는 감히 상상할수도 없지만 규서는 자연의 음악을 듣는거죠. 키냐르처럼 말이죠.

마지막 장면은 슬프고 아름다워요. 

늙은 체니와 늙은 나레이터가 마주 앉아 피아노 치는 시늉을 하죠. 

소리 없는 음악이 흐르고 

어둠이 깃들고

늙은 로즈먼드가 들어오고..... 


쓰다보니 리뷰도 참 덧없는 글이네요. 

무한대로 열린 독법을 제시하는 책인데 읽지 않는 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하네요. 

칠월이 금방 저물어가요.     


빈 여행중 묘지 정원에서
작가의 이전글 철원 戀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