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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ug 08. 2020

당신의 안부를 묻습니다

입추

쟝주네의 글은 읽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의 도둑일기는 앞으로도 읽지 않을 거 같기도 합니다. 

그의 삶이 기록된 그 글은 늙은 내가 흡수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아서죠. .

이젠 지나치게 악하거나 비루하거나 고달픈 삶은 버겁습니다. . 

시간과 생활이 벽돌처럼 단단하게 구워진 글들은 그 무게 때문에 읽는 사람의 에너지가 필요하거든요.  

젊을 때는 생각이 없어서거나 넘치는 에너지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글들을 읽었지만

이젠 생각도 많아지고 에너지는 적어졌죠. 

무엇보다 이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책을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날이 내게 다가오리라는 것을 정말 몰랐습니다. 

흥미롭기도 하죠, 경험해보지 않는 思考가 진리처럼 우뚝 앞에 서있는 모습은요.   

무거운 현재보다는 뇌가 힘들 수는 있지만 정신 쪽으로 가 있는(그것이 가볍다고?)

글이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젠 입추였어요. . 

그렇다고 해서 아직 찬바람 머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정말 오란비가 지나치게 길어서ㅡ 수년래 자신의 활동량이 적어서 한이 맺힌걸까요ㅡ

창문을 열면서 가을바람을 느끼려고 숨을 들이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입추 날이면 그리고 처서까지 15일 정도 

가을이 뒤뚱거리며 서서 걸음마를 하는 사랑스러운 시간,

<가을이 섰습니다. 매미소리가 들립니다. 

아침에.....창문을 여니 약간 서늘함이 느껴졌어요. 그대 계신 곳은..... > 

그런 아주 밍밍한 일상의 어투에, 

혹시 가을이 실릴까 봐 저어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곤 합니다. 

그 시간이면 매미 소리가 가장 왕성한데 자신의 짝을 찾는 매미소리는 

여름의 정한을 가득 담은 채 가을 자락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내 글이 당신께 가기도 합니다만 그러기 전 이미 당신은 나의 볼모입니다. 

파스칼 키냐르가 자신의 글에서 수많은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내서 살려내듯이

나는 당신을 소환합니다.       

윤동주의 시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도 아마 이즈음의 하늘이 아닐까요, 

가끔 생각해보는 데 그의 시는 시가 아니라 편지로 여겨지곤 합니다. 

시와 편지에 대한 차이를 생각해본다면 

시는 등경 위에 올려놓은 등불이라면, 그래서 혼자서 존재하는 것이 시라면 

편지는 그 불빛 아래서 글을 읽는 사람의 손과 함께 하는,  

편지는 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글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쟝주네가 쓴 자코메티의 아틀리에를 읽었습니다. 

눈먼 자들을 위한 조각가, 쟝주네는 자코메티의 조각을 눈을 감고 만져볼 때 기쁨을 느꼈다고 쓰더군요. . 도나텔로의 복사본을 그렇게 했을 때는 기쁨이 없었다고, 

쟝주네같은 세계적인 작가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때 더 유명한 어떤 대상을 폄훼하며 자신의 의견을 강화시키기도 하더군요.    

밑바닥 삶을 전전하며 감옥에서 펴낸 글 때문에 쟝콕토의 눈에 띄었고 

사르트르는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내 프랑스 문학의 보물이라며 쟝주네를 종신형에서 구해내게 되죠. 

그런 사르트르가 쟝주네의 작품집 서문을 슨다는 것이 너무 분량이 많아져서 

한 권으로 묶이게 되었는데....

누군가에게 자신을 샅샅이 더군다나 구질구질한 내면까지 까발리게 된다면 

정육점에 걸린 부위별 고기처럼 자신이 보이지 않았을까요? 

사르트르가 쓴 세인트 주네라는 글을 읽어보고 싶은데 우리나라에 번역되지는 않은 것 같더군요. 

사르트르가 자신에 대한 분석 글을 발표한 뒤 쟝주네는 한참동안 작품을 쓰지 못했다고 해요. 

더군다나 ㅈ코메티에 관해 그렇게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쟝주네인데요.   

없으면 살 수 없는, 

생명의 근원인 물과 흙이 사람을 앗아가는 모습을 보며 생각이 많습니다.

물도 흙도 많으니 사람조차 죽게 됩니다. 

저 거침없는 모습을 보며 소유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는 사유는 정말 너무 소소한가요.      

이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우에/내 일홈자를 써보고,/ 흙으로 덥허 버리엿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부끄러운 일홈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이름자를 쓰고 덮어버리는 고독한 젊은이가 그립습니다. 

사람들에게도 고독은 이제 생경한 무엇입니다. 

물론 내게도 그런 순수한 고독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당신의 안부를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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