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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ug 11. 2020

에드워드 사이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수년전  성판악에서 비가 오락가락하던날 오르던 왕복 18KM의 백록담 같은 글이다.

페이지를 쉬 넘기지 못하고 읽은 곳을  또 읽고 또 읽고 있다.

화장실에 가서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도 생각하며 읽고

다시 커피 한 잔. 하면서도 읽는다.

가끔 머릿속으로 북한산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 계곡을 흐르고 있을 물을, 물의 양에 의해 달라지는 소리를 생각한다.

여름 숲은 소리 없이 절정에 달해 있을 것이다. 칠 팔월 더위에 무추름 하다가도 이렇게 비가 내리면

숲은 여름의 정렬을 기억하며 왕성하게 움직인다. 

숲그늘은 더욱 짙을 것이다. 

그늘이 짙다는 것은 숲이 사색하는 시간이란 뜻도 된다. 

모든 그늘에 고여 있는 것은 사유니까, 

그 사이로 매미소리가 처연하다. 짝을 찾아야 할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비는 세차게 내리지.....농부의 시선보다 더 암울하게 비를 바라볼 것이다. 

여전히 매미에게도 나고 자라고의 죽고의 명제는 중요한 것이다

저 애달픈 소리들은 결국 삶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내는 소리이지 않겠는가, 

.

글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언제나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나를 더듬거리게 하는 것이 좋다. 

너무나 우리 인생이 빤하니까

빤한 글자로 된 어떤 상태를 설명하는 

손에 잡히지 않는 저기 먼 지성의 상태를 바라보는 재미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해가 잘 안되는 그 대목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혹시 다음 길에서 우연히 깨달아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에드워드 사이드는 

<조화롭지 못하고 평온하지 않은 긴장 무엇보다 의도적으로 비생산적인 생산력을 수반하는 말년의 양식을 탐구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말년의 양식을 쓰다가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 말년의 양식 어디쯤인가는 모르겠지만 

나머지 부분을 그를 잘아는 친구와 아내가 힘을 합해 마무리 했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영국식 이름 사이드는 중동식 이름이라고 한다.

그는 실제 팔레스티나 사람이지만 미국 국적을 가진 미국의 교수다.

평생을 두나라를 품에 안고 살아왔는데

그는 오개국어인가를 했다고 한다. 

미국이 3차 중동전쟁을 일으키면서 미국내 그는 미국내에서 갑자기 팔레스타인이 되었다.

그 역시 이스라엘의 전쟁 승리에서 팔레스타인이 되어 눈물을 흘려야 했고 

이 전쟁 후 그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저서를 쓰게 됐다.

나도 오리엔탈이라는 단어가 동방을 근동을 혹은 우리나라까지 포함한 아시아를 지칭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의 시작은 

결국 서양에서 바라보는 서양의 시각으로

모든 수많은 개개의 동방 문화가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즉 서양을 우위로 하는 서양이라는 권력에서 출발한 단어였다. 

서양은 우월하며 남성적이고 강인하다면 동양은 약하며 여성적이라는, 

실제 옛 시절 영국 사람들은 도덕적인 자신의 사회에서 하지 못한 바람피우는 일을 

터어키나 동방의 나라에 와서 자연스럽게 하곤 했다고 하니,

에드워드 사이드의 <만년의 양식>을 읽게 된 것은 그의 오리엔탈리즘보다는 덜 지루할것이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랑거리는 노년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그가 말하는 노년의 양식, 그는 음악가의 노년에 대해 여러 편의 글을 썼는데 

베토벤의 노년 시절 작곡된 파상적 음들은

화해 불가능한 요소들을 계속 분리된 채로 놓아두었고 그런 과정을 통해 

<음악은 의미심장한 무엇에서 점차 모호한 무엇 심지어는 자신에게도 모호한 무엇으로 변형된다>

<새로운 부르주아 질서에 대한 음악의 거부를 통솔하고 

쇤베르크의 완전무결하게 진정하고 참신한 예술의 전조가 된다>

(그의 글에 의하면 나는 확실히 음악에 문맹이었다)

어쩌면 베토벤은 에드워드 사이드나 아도르노의 논리없이 무작정 바다....음악이라는 바다를 향해서 헤엄쳐 갔을수도 있다.

그런 그의 음악을 음악가이자 철학자인 아도르노와 에드워드 사이드 두 사람이

저런 알 수 없는 상태의 문장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생각하는 작품을 작곡함으로서 생각하는, 지적인 브르투오소로 하여금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창안하고 혹은 개정하고 재 조정할 수 있게 기회를 부여한 작곡가>가 글랜 굴드가 바라본 바흐였다

그랜굴드의 연주. 

’그의 연주는 워낙 독특해서 청자의 환심을 사거나 고독한 황홀경과 

일상의 혼잡함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

‘연주를 통해 여전히 작곡되는 중임을 보여주는 예술을 대표하는 비평적 모델’. 

나는 이 책을 보며 읽으며 혹은 스치며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배웠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읽는다하여 말년의 양식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안다해도 실천할 힘이 없는 것처럼 

어느 문제는 이미 그 문제에 관해서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 선명한 답은 없다는 것을, 


그저 

향기처럼 연기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져갈 감정처럼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에 관해 한줄평을 쓰라면 

말년, 혹은 노년이라도 노년이나 말년으로 핑계대지 말며 생을 쉽게 살지  마라는 것, 

더욱 치열하게 더욱 창의적으로 더욱 거세게 살라는 것, 

겨우 수다를 마음놓고 부릴수 있는 친구 몇과 독서 영화 그리고 암짝에도 쓸데없는 글을 쓰는 재미로  

말년을 살아가는 말년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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