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로니무스 보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by 위영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




데미안의 첫 챕터는 ‘두 세계’로 시작된다.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싱클레어는 크로머를 만난다.

그들의 영웅담 비슷한 나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크로머의 눈에 들고 싶어서,

싱클레어는 하지도 않는 도둑질 이야기를 하게 된다.

결국, 크로머에게 휘둘리게 되고 그 일로 병까지 얻게 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크로머가 지닌 악에 대한 미묘한 동경심이 있다.

젖은 신발이라는 사소한 문제로 나무라는 아버지를 보며 그런 아버지를 경멸하는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어둠과 밝음, 선과 악, 본체와 그림자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 속에는 피할 수 없는 양면성이 숨어 있다는 것을

헤르만 헷세는 어린 소년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다.

그 시절 화가들이 주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밝은 그림을 그렸다면

보스는 그 반대의 어둠을 그려낸 사람이다.

선한 사람보다는 악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 속 주제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악마를 부르는 사람’이라는 별호가 따라다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으나 그의 삶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브뤼헐에게 영향을 주었으나 어느 파에 속하지도 않아서

혹자는 히에로니무스 보스를 ‘서양미술사의 섬’ 같은 존재로 표현하기도 했다.

목판에 유화로 그려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쾌락의 정원>은

여전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에 쌓여 있는 비밀 가득한 작품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는 1515-16년경에 그려진 오래된 그림이지만 형식에서 탈피,

현대의 작품처럼 보인다.

표정만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이 독특한 작품 역시 여러 가지 해석이 많다.

증오와 협박이 난무하는 무서운 표정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검은색 끈으로 묶인 채 끌려가는 두 죄인이 있다.

오른쪽 하반부에 있는 행악자는 자신의 죄에 대한 성찰은 전혀 없이 오히려 분노와 증오에 가득 차서

자신을 잡아가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를 붙잡고 가는 사람들은 죽음 앞의 사람이라는 긍휼은 어디에도 없이 감히 네까짓 게….

하는 듯이 경멸의 표정이 가득하다.

오른쪽 상반부의 죄인은 아마도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며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자일 것이다. 입을 다물고 있는 성직자의 위협적인 눈빛과 무슨 말인가를 전하고 있는 사이에서

그는 고통과 두려움에 질려 있다.

두려움은 매우 싫은 감정이지만 생각해보면 두려움은 우리를 신에게로 우리는 이끄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

두렵지 않은 자 겸손하지 못할 것이며 죽음이나 삶에 대해 두려움이 없다면 그 인생은 천박하거나 경박할 뿐이다. 두려움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작은 손짓이다.

좀 더 깊게 바라보면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르는 십자가가 있고 그 십자가를 붙잡은 손이 보인다.

예수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손이다.

거의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사람으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 저절로 떠오르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녀 베로니카가 있다.

베라 이콘(vera icon:참된 모습)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어 베로니카라고 부르게 된ㅡ예루살렘에 살던 경건한 여인이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의 땀을 닦았을 때 그 수건에 새겨진 예수님의 얼굴을 들고 서있는ㅡ여인이다. 폭력과 죄악이 난무하는 세상을 살짝 등진 채 그녀는 자신만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이 어찌 되든 나는 예수님만 바라볼 거예요. 당신들도 그렇게 소란스러운 세상에 갇혀 있지 말고 이리 오세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세상 속에 살더라도 예수님과 함께라면 평화로울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베로니카의 예수님은 눈을 뜨고 가만히 화면 밖 관자들에 묻는 듯하다.

너는 어떠니? 너는 저 사람들 속에 속해 있지 않니?


예수님은 광란의 한가운데에 계신다.

수백 년 전의 일본 작가가 했던 요즘 것들은.....

이란 말처럼 오백여 년 전의 그림이지만 이 시대를 보여주는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다.

저 무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 박으러 가면서도 오히려 예수님께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분노와 죄악과 격정에 빠진 저들 마음속 어디에서 예수님이 자리할 수 있겠는가,

자신만을 생각하는 바로 그 탐욕 때문에 저런 험악한 표정들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예수님은 고요하시다. 침묵뿐 아니라 눈도 감으셨다. 이제 여기서 내가 할 일은 다 했구나.

안도의 표정도 조금 엿보인다. 그분의 고요를 깨드릴 소란은 이 세상에는 없다.

너희들도 침묵하렴, 고요해야 해, 몸으로 보여주신다. 침묵의 정점, 고요의 방점이시다.


대마도 신사에서 본 소나무가 잊히지 않는다. 바다가 지척이었는데 밀물 때는 신사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밀려든다고 했다. 그 소나무 뿌리는 온통 뒤, 숲으로만 향해 한도 없이 뻗어 나가 있었다. 그곳에 엄청나게 큰 녹나무도 있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녹나무 안을 자꾸만 비워서라고 했다. 나무속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보니 정말 저 위 하늘이 보였다. 가운데가 텅 비었어도 나뭇가지는 푸르고 싱싱했다. 침묵과 고요 속에 거하던 소나무 뿌리와 속 빈 녹나무는 그들만의 치열하고 웅혼한 삶의 서사였다.

코로나 19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고달파진 삶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기회일 수도 있겠다.

침묵할 수 있고 고요할 수 있는 시간!


쾌락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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