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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Sep 24. 2020


깊은 밤이었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골목은 내겐 아주 익숙한 길이었는데 문득 생각해보니 지금 사는 곳이 아닌 옛날에 살았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현재 사는 집과는 그다지 멀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길이, 내가 지금 살고있는 집으로 가는 길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손을 잡고 오는 부부, 아는 권사님을 만났다.

 ‘권사님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옛날집으로 와버렸어요.’ ‘하하 그럴 수 있지요.’ 그들과 웃고 헤어졌다. 

자존심이었을까, 부끄러움 때문이었을까, 지금 사는 집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뺐다. 

헤어져서 다시 혼자 길을 가는데 여전히 집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 이게 치매의 시초인가.....이렇게 길을 잃어버리게 되면 이제 밖을 나다닐 수도 없겠구나……. 

그러나 우선 집을 찾아야 하는데…….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해 왔고 온몸이 무거웠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게 꿈이 아닌가...꿈일까, ,,, 깨니 꿈이었다. 

마치 여진처럼 꿈을 깬 후에도 가슴에 저릿한 통증이 한참 남아 있었다.      


성경에도 꿈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서 꿈을 폄훼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상으로 이루어지는 꿈속 상황들에 특별한 의미 부여는 하지 않는 편이다. 

굳이 갈래를 나눠 본다면 치매에 대한 두려움이 그렇게 꿈속에서도 연장 되었을까,  

요즈음은 아닌데 자주 꾸는 꿈 중의 하나는

운전을 하고 가는데 길이 점점 가파르게 일어서는 것이다. 

내 차도 점점 길을 따라 일어서고, 아 이러다가 내 차가 뒤로 구르겠구나 ..하는 순간에 깨는 개꿈.    


꿈 이야기를 하면 자동반사적으로 장자가 떠오르는데 

그는 나비가 되어 꿈속에서 즐거웠다고 표현했다. 나비는 과연 즐거움을 알까? 

내가 나비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인가, 꿈속의 내가 나인가, 현재의 내가 나인가, 

제자의 대답도 좀 이상하긴 하다. 

‘너무 커서 현실에서는 쓸모없음 같습니다.’ 

크다도 복잡다단한데 거기서 왜? 쓸모없음이 나와, 

그러니 장선생이 

‘니 발이 닫고 있는 땅만 필요하니? 필요 없음이 없다면 어쩔래? 필요 없는 것들이 너를 지탱해준당께.’ 


그러고 보면 서양철학은 가령 존재라는 단어 하나를 가지고도 

생각의 갈래를 세심하게 가닥가닥 나누고 다시 자르고 뒤집어서 또 보는데 

무수하게 분석하고 자르고 탈탈 터는데

동양철학은 커다란 보퉁이 하나를 안겨주는 것 같다. 

道란 無여~ 도는 자연이제! 그랑께 덕을 지니려면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혀! 

도에서부터 턱 막힌다. 도가 머여?     


推一事可知는 내가 즐겨하는 사고의 한 방법인데 

기실 아무런 쓸모없거나 완전히 다른 해석일 수도 있는 오류를 가득 품고 있다.  

열 일이 있으면 최소 열 이상의 상황과 해석이 무수하게 있는데 

한가지 일로 그 열 일을 어찌 해석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인생에 추론이 없다면 과학도 없을 것이다. 

모든 발전과 해석 속에는 추론이 그득그득 고여있다. 

나는 별을 보고 있는데 그 별빛이 수억 년을 지나서 지금 내게 다가온것이라고.....?

인류의 시작은 수억년이라고?

억년을 당신은 과연 상상할 수 있는가, 

찰라가  10-19라는데 

(이게 이렇게 써질 것 같아서 퍼왔는데도  한글에서는  -19가 10자 오른쪽 위로 올라가질 않는구나)   

그 찰라를 상상할수 있는가, 영원은?

이 단순한 팩트조차 추론성이 없다면 이해 불가능한 이야기다.        


어제 어느 분과 브런치를 했다. 아주 예쁘게 담아진 샐러드를 먹으면서 그리고 다시 커피 한잔을 하면서 세 시간여 쉬지 않고 대화를 했다. 잘 듣고 잘하는 대화였다.

이야기들중의 하나

    

<1과 2는 친구였다. 

2가 좀 거시기한 행동을 같이 속한 단체에서 했다. 

1이 2에게 말했다. 너 그 행동 하지 말래? 

2가 말했다. 안하는데 너만 그리 생각하는 거여.

1이 말했다.  3도 그러던데?. 

2가 3을 불러서 물었다. 그 말 했수? 

당황한 3이 안 했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2가 1에게 와서 말했다.

안 했다고 하던데? 니가 지어낸 거지?

1과 2와 3이 만나 삼자대면을 했다.

3은 자신이 말했다고 그제야 시인했다>   

 

어린 시절 자주 일어났던 이야기다. 

그런데 오십에도 육십에도 일어나고 아마 칠십이나 팔십에도 일어날 수 있다.

신뢰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 신뢰보다 질투가 우선한 경우이다. 

1과 2는 친구이지만 성이 다른 사람이 그 사이에 끼게 되면 복합화학물질인 질투가 생성된다. 

아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새로운 인간관계에 의해 돌출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사과를 하긴 했지만 장관의 뒷말이 참 그렇다. 

검사 안 하기 잘했어요. 사람 여럿 잡았을텐데....    


뒷말의 효력은 사람을 결집하는 데에 있다.

하는 사람은 자신의 속맘을 들어내며 손가락질을 해서 시원하고 

듣는 사람은 그와 밀착된 감정을 느낀다.

흉보는 것을 보니 나를 신뢰하나 봐 좋아하나 봐,   

나 아닌 그곳에 없는 타인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쾌감도 상당하다. 

듣는 사람은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나 손가락질받는 사람보다 우월한 감정을 느낄 때도 있다. 

어이구 당신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여, 생각하지만 물론 티는 내지 않는다. 

서로 밑바닥을 보여주면서 한편이 된다고나 할까,   

  

이만큼 살아보니까 

비유를 하자면 사람은 웅덩이 물 같은 존재다.

그 밑바닥에는 무수한 것들이 고여있다. 

가만두면 제법 맑으나 밑바닥을 흔들면 탁해진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러니 부러 밑바닥을 자주 보여주려 하거나 남의 밑바닥을 흔들 필요도 없다.   

  

꿈은 세 가지다. 

자면서 꾸는 꿈 

이상이나 희망을 이름하는 꿈

헛된 생각이나 기대

전혀 다른 꿈들이지만 사라지는 형태로는 거의 비슷하다.  

어쩌면 내안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이 현현될 수도 있다.  

꿈은 깨면 사라지니 얼마나 덧없는 아름다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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