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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Oct 05. 2020

한가위를 보내며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내 플사에 기록한 단어인데 

삼국사기에 김부식이 궁궐을 지은 후 그 궁궐이 주는 느낌을 적은  글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검소함부터 화려함까지 두루 섭렵하되 누추함과 사치는 경계하라는 말일것이다.  

궁궐을 사람으로 바꿔도 좋다.

겉은 소박하나 그 내실은 당당하고 

아름다운 외양과 함께 그 내면은 따뜻하게(사치는 왠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단어이다) 

빌립보서의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자세히 보면 바울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족하는 것을 배우니 비천도 풍부도 별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다.

비천한 사람도 풍부한 사람도 사랑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지니고 있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는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통계란 어떤 사실의 경험치를 모아 요약된 수치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거로 생각한다. 

물론 서로 좋아지기 위한 담론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어제 신문기사에서 서독인들은 29평 아파트에 살고 동독인들은 24평에 산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런 통계는 왜 내는 걸까,

작은 머리를 아무리 궁글려도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굳이 이런 경제적 차이가 기반된 프레임을 씌운다면

동서독인들 모두에게 유익할까? 그 차이를 알아서 도움이 될까, 

작은 것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던 사람들에게

29평이 평균이야? 나는 왜 평균에 못 미치지? 필요없는 생각을 하게 하지 않을까, 

기실 차이는 세상 만물에 가득하다.

하다못해 한 엄마 배 속에서 자라는 언니와 나를 봐도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약했고 나는 태어날 때부터 통통했다.

한 부모 아래서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고 비슷하게 배워도 삶의 갈래는 천양지차로 다르다.

다르고 차이나고...이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창조의 비밀과 섭리가 여기에도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익숙함을 벗어나 그 다름을 찾아서 떠나는 것이다. 

모든 다름과 차이는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왜 경제만 같아야 한다고 생각할까, 

경제의 중요성을 몰라서가 아니다.

임금님도 가난을 어찌하지 못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아파트 평수로 다름을 찾을 것이 아니라 

이전의 삶에서 변화된 모습일지, 

행복의 척도일지, 

가치와의 공존일지, 

이런 의미 지향점이 있는 통계가 필요하지 않을까,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풍성한 마음과 음식에 기대어 있다. 

이전 세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도

우리는 더욱 심한 갈증에 허덕이고 있다. 

나 역시 분위기 좋은 카페를 즐기며 청결한 곳을 좋아하고 맛있고 비싼 것들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그것을 날마다 즐긴다면 그것이 과연 즐거움이 될 수 있을까, 

소박한 삶가운데 더 깊은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예배 앞에 대면 비대면이라는 단어가 따라붙었다.  

예배는 정신없이 살다가 정신을 차리는, 

시끄럽게 살다가 문득 고요해지는, 

나를 잊고 살다가 나를 찾게 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즈음 풍성해지는 가을 달처럼 내 안에 존재하는 나의 영혼과 

세상 모든 만물 속에 존재하시는 그분과의  만남인데 거기에 대면 비대면이라니,

그러다가 소스라치듯 어느 순간에 든 생각! 

혹시 그분과 내내 대면 예배를 한다면서 비대면 예배를 하고 있지 않았나,

그래서 이런 일이 생겼는가,

깊은 밤 사람 드문 산책길에 달은 더할 나위 없는 근사한 친구다. 

달을 대면하고 걷는다. 

달에게는 나 같은 사람 언제나 비대면일 것이다.

그저 나 혼자 죽자고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나도 기실 그를 보며 걷지만 무수한 다른 생각을 한다. 

아니 오히려 그를 바라보는 것은 그 아닌 생각을 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달을 보는 위장?속에서 더 선명한 나와 만나는 것, 

라캉은 거울에 비친 이미지에 매혹당하고 그 이미지에 따라 자아를 형성한다고 했다. 

기기 시작하는 아이들 앞에 거울을 놓아주면 자신과 한참 논다.

거울은 물리적인 거울 뿐 아니라 타자도 나의 거울이 될 수 있다.

저 달 역시 나의 거울이다. 

그를 보지만 그를 생각하는 게 아닌 자유로움.

그리고 다시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

홀로 있는 그의 모습은 삶 역시 홀로 가는 길이란 것을 가르친다.

높이 떠 있는 고고한 모습은 

내게 삶을 조금 벗어나라고 속삭이며 다른 길이 보일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변하지 않으면서 변하는, 

달빛 아래 대청에서 달을 바라보다 낯선 사람에게 탁주 한잔을 대접하는

윤오영의 달밤이 기억났다. 

산책을 끝내고 와서 정민이 편집한 윤오영의 수필 곳감과 수필에서 달밤을 천천히 읽고 내처 여러 편을 읽었다. 

정말 검이불루한 글속에 검이불루한 삶이 보였다. 수필은 삶이다. 


                                                                          사진은 전부  연천 화가 윤금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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