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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Oct 25. 2020

다시,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시월 북클럽에서 읽은 책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었다. 

오래 전 읽고 싶어서 샀고 그 후 다시 한번 들춰 슬슬 읽었으니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런데도 몇 가지 스토리적?인 이야기를 빼고는 처음으로 읽듯이 낯선 책이었다.

책이야 변하겠는가, 현저한 기억력 저하와 함께 

책을 읽는 나라는 주체의 변화에 더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마치 가뭄 속에 단비가 내리듯 월든의 글들이 나를 적셔 왔다. 

특히 자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사물에 대한 그의 유려한 사고와 빛나는 문장들이 함께하며 나를 매료 시켰다. 

소로는 이십여 년을 월든을 바라보며 살아왔는데 호수는 매번 마치 처음 보듯이 그를 감동케 했다. 

매일 새로운 풍경이 자라나고 호수 표면에서는 사상이 샘처럼 솟아 오른다고,. 

교활함이라고는 모르는 용감한 인간이 호수를 매만지고 생각 속에서 깊이 파고 맑게 한 후,  

호수는 나와 같은 회상에 잠기고 ‘월든 거기 자넨가’ 말할 뻔했다는 소로.   

      

老라는 글씨에는 흙으로 변해가는.... 이란 뜻이 담겨있다.

흙이 무엇인가, 굳이 죽음을 의식하지 않다 하더라도 흙은 자연이다.  

그러니까 늙어간다는 것은 자연과 친해지거나 자연화 되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월든 호숫가에 살아가는 것 보다 천국에 더 가까이 다가갈 방법은 없다고 그는 적고 있는데. 

월든 호수뿐일까, 우리가 살아가며 매일 만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이즈음 쪽빛처럼 푸르른 가을 하늘, 그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 희미하게 보이는 낮달,

땅에 무수히 굴러다니는 낙엽들,

이들 모두는 우리에게 고전 이상의 책이다. 

그들은 어떤 고전보다 더 깊은 뜻을 품고 있다.

어쩌면 자연은 심오하기 이를 데 없어 어떤 철학책보다 더 철학적일 수 있다. 

그들을 사유하며 읽을 수만 있다면,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좋은 텍스트를 읽을만한 여력이 없는 것이다.    


깊은 사유력이 모두에게 허락된 능력은 아닐 것이다. 

소로는 월든을 통해 자연을 어떻게 느끼고 사유하는가를 배우게 하는 책이다.

좀 길지만 인용해본다.


“나는 어느 시인이 농장의 가장 값진 부분을 눈으로 즐기고 돌아가는 모습을 자주 보는데 성마른 농장 주인은 그가 야생 사과를 몇 개 따 갔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왜 농장 주인은 모르는 것일까? 몇 년 전부터 그 시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훌륭한 울타리라 할 수 있는 시의 운율 속에 그 농장을 옮겨다 놓고 그곳에 가둔 채 젖을 짜고 지방분을 걷어낸 다음 크림은 전부 떠 가고 그에게는 오직 탈지유만 남겨두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꼭 풍경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소유했어도 그 아름다움을 모르는 자 많고 

없어도 누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우리가 좋아하는 돈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시처럼 울림을 지니기도 하고 무서운 폭력이 되기도 한다. 


저녁답 들려오는 소의 감미롭고 운율적인 소리에서 소로는 음유시인의 목소리를 연상해낸다.

그러니 나도 자연스레 

깊은 가을 날 오후 

홀로 걷던 북한산 산길에서 떨어지던 도토리 소리가 생각났다. 

조그마한 열매의 소리라고 여겨버리기에는 마치 천둥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컸고 

그 여운은 오래 갔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파던 소리

ㅡ고개를 뒤로 한 컷 제쳐서 반동의 힘까지 사용하던ㅡ도 생각난다. 

강인하면서도 애잔한 슬픔을 담고 있던 소리,  

작은 부리가 나뭇가지를 치는 소리는 존재를 향한 세레나데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남의 집이 되어버린 본가의 뜨락에서 있었던 일이다.

늦가을 햇살이 눈부신 날이었다. 

엄마는 호미로 마당 가에 난 잡초를 뽑고 계셨다.

“아야, 이것 봐라, 늦가을에 난 풀들은 자라기도 전에 꽃피어서 열매를 맺어야,

즈그들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을 것을 아는 거제.”

정말 솟아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주 작은 쇠비름이 노오란 꽃을 매달고 있었다.

엄마는 이미 자연의 철학을 체득하셨던 것이다. 

월든에는 이 쇠비름을 살짝 데쳐 샐러드로 먹는, 소로의 풍성한 식탁 이야기도 있다.

소로는 혼자 월든에서 살던 2년, 사람들은 자주 고독하지 않는냐고 물었는데 

조그마한 솔잎 하나하나가 공감으로 확장되고 부풀어 올라 친구가 되었고

쓸쓸한 장소에서도 친근한 어떤 존재를 느꼈고

그 존재들이 반드시 인간일 필요는 없었다고 술회한다.    

           

좋은 책이나 저자를 만나면 이제 연보를 읽게 된다. 

짧게 서술된 한 사람의 연보가 의외로 그를 이해하는데 커다란 틀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1851년        일기를 보면 에머슨과의 사이가 조금씩 멀어졌다. 

1860년 11월   숲에 들어가 나무 그루터기의 나이테를 세다가 독감에 걸린 후 

               기관지염으로 병이 악화 되었다. 

1861년         기관지염은 폐결핵으로 판명되었다. 

1862년 5.6일     눈을 감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사슴’과 ‘인디언’이었다.    

29살의 젊은 나이에 그는 오두막을 짓고 월든과 동거하기 시작했다. 


월든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 영감의 원천이며 사유의 대상이었고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삶의 본산이었다.

나는 나의 월든을 찾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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