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ter Brugel the Elde
겨울나무도 가지각색이다.
늘푸른나무는 열외로 치더라도 가을 낙엽들을 여전히 매달고 있는 대왕참나무, 플라타너스를 보면 저들의 집념을 기억해야 할 것인가,
그 질김에 고개를 흔들어야 할 것인가,
목수국 꽃도 강하다.
처음에는 어여쁘고 순결한 색으로 피어나서 가을에는 보라 핑크로 어여쁘게 물들더니 한겨울인 지금까지 빛바랜 낙엽색으로 나무를 지키고 있다. 새순, 그 여린 것들이 밀어내기 전 꼼짝도 안 할 것이다.
물론 태반의 나무들은 겨울이 오기 전 가지만 드러낸 채 겨울을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다.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방법이 다른 거니 호불호를 이야기할 것은 아니다.
피터 브뤼헐의 <장님들의 우화>에도 나무들이 많이 나온다.
초여름쯤일까, 우거진 나무들이 싱싱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부러지거나 죽은 나무들도 곳곳에 있다.
장님들이 지나가고 있는 동네 뒤편의 작은 길 곁의 나무야 그렇다 치더라도 교회 앞 죽은 나무는 더욱 수상하다.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교회의 미래를 죽은 나무로 암시한 것일 수도 있다.
장님이나 소경, 봉사, 맹인이란 단어를 쓰면 안 된다.
시각 장애인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니 이 작품도 지금 식으로 번역하자면 <시각 장애인들의 우화>가 맞다.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누가복음 6:39>
성경 말씀 속 맹인은 단순히 앞 못 보는 사람을 일컫는 말씀이 아니다.
육체의 눈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 혹은 마음의 눈에 관한 이야기다.
어리석은 사람, 욕심에 빠져 한 치 앞을 못 보는 사람,
눈앞의 것이 다인 양 살아가는 사람,
재물과 권력만을 향해서 질주하는 사람,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나와 상관없다고 여기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비유적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그 시절 사회를 이끄는 바리새인의 우매함을 지적했지만, 특별히 리더에 초점이 있다.
그림 속 맹인들의 리더는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다.
악기 연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불러모으는 일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제일 앞에 서서 걸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무너지자 그가 이끄는 모든 사람이 위험에 처했다.
선동되거나 맹목적인 의지에 대한 경고도 있을 것이다. 덧없는 세상의 유행을 좇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단에 대한 비유로는 더할 수 없이 적절하다.
사망의 나무와 구원의 꽃 사이에서 헤매는 사람들의 단면 같기도 하다.
성경 내용을 그리고 있지만 실제 피터 브뤼헐은 부패하고 무능한 지도자와 선동가에 이끌려가는 1500년 대의 플랑드르 사회를 그렸다.
당시 브뤼셀은 스페인의 통치 아래 핍박을 받던 시절이었다. 폭정 속에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피폐하고 고통스러웠다.
브뤼헐은 정치와 지배계급에 대한 손가락질을 성경 속 사건으로 치환했다.
실제 맹인을 묘사하는 브뤼헐의 시선은 냉정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정확하다.
한사람이 넘어져서 금방 자기들도 넘어지게 되는데도 천연덕스러운 뒷사람들의 표정이라니,
모두 여섯 명, 세상 속에 살아야 하는 엿새를 의미하는 일까,
팀의 리더가 빠지자 두 번째 사람 역시 금방 웅덩이로 빠져들 것 같다.
죗값으로 눈알을 뽑힌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세 번째 사람이 의지하는 지팡이를 꼭 잡고 있다. 누가 누구를 인도한다는 말인가,
네 번째 사람은 각막백반. 곧 닥칠 일을 보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
시각 장애인은 눈을 보지 못하는 대신 귀가 아주 밝다고 했다.
어쩌면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소리로는 앞선 사람이 구렁텅이에 빠진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지팡이나 연결된 사람의 어깨를 놓을 생각이 없다.
두려움이나 타성이 그들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맹인을 보라, 저 감은 눈으로 그림 밖 우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하고 있지 않은가,
구경할 만해? 눈 뜬 너희들은 다를 것 같아?
수백 년이 흐른 과거 속 그림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는 현실적인 그림이다.
평화로운 마을을 지나 멋진 교회를 앞을 흐르는 시냇물은 아름답지만 장님들은 그런 아름다운 길을 지나갈 힘이 없다.
그들에게 허락된 길은 좁고 협착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뒷길이다.
서로를 의지해서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대다수 사람의 애환을 여실히 보여준다.
브뤼헐은 초상적인 특징이 없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그렸다.
그의 작품 속에서 사람은 그저 불특정 다수의 사람으로만 존재한다.
작품 속의 익명성은 오히려 그의 그림에 더 진한 감동과 감정이입을 하게 한다.
아름다움이나 지적인 혹은 추구해야 할 가치조차 사치스러운 사람들의 삶,
그래서 더욱 사람의 삶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의 유명한 <네덜란드의 속담>이란 작품에서도 무수한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어느 사람도 아닌 동시대의 평범한 인간들이다.
그 작품 속 끝에 보일락말락 지팡이와 함께 걷는 세 사람의 맹인이 등장한다.
<장님들의 우화>는 브뤼헐이 세상을 뜨기 전에 그렸다.
과거 자신의 작품 속에 아주 작게 존재하던 맹인을 불러내 크고 선명한 초상으로 그들을 그렸다.
그는 볼 수 없는 맹인을 그렸지만, 그의 내심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눈뜬 사람을 그려낸 것이다.
동네를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나무를 키우며 소들의 물이 되던 시냇물이
장님 앞에서는 구렁텅이가 되었다.
냇가의 죽은 나무는 생명처럼 죽음도 공평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걸까,
하얗게 피어있는 붓꽃이 그런 그들을 무연히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