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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Feb 20. 2021

인간 생활의 허영

하르멘 스텐베이크(Harmen Steenwyck)


                                                                                                       

중국의 화가들 중 사대천왕의 한사람인 유에민준의 작품이 한가람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닌, 크게 웃고 있는데 어찌 저리 슬플 수가 있을까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엄청 비싼(?) 화가다. 

이번 전시회에는 특별히 그의 작품 속에 해골이 등장한다. 

얼굴에 해골이 있거나 눈동자가 해골이고 아예 해골의 눈동자 속에 웃고 있는 사람이 들어있는 얼굴이다. 

그만의 방식으로 나타낸 바니타스일것이다.  


바니타스의 원조는 누가 뭐라 해도 전도서 기자이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무려 다섯 번의 헛됨을 통해 허무를 강조한다. 

인생은 허무하니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죽음이 있는 삶의 허무를 기억하며 살라는 지혜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 헛됨을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방의 바니타스 사조가 새롭게 조망해낸다. 

종교 전쟁으로 인한 사회의 피폐와 흑사병의 전염으로 인한 죽음등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삶에 가득한 죽음을 직시하는 시선으로 바니타스 정물화가 피어났다. 

 바니타스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와 연결된다. 

고대 로마 장군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와 개선  행진을 할 때  줄 뒤에서 라틴어로 메멘토 모리를 노예들이 외쳤다고 한다. 

영광의 정점에 있을 때 죽음을 생각하라는 로마의 풍습은 지금 오직 현실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새겨야 할 사안 같기도 하다. 

메멘토 모리에 걸맞은 뜻으로 카르페 디엠, 현실을 즐기라고 하지만 죽음 앞에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즐기는 일만을 말하는 것일까

그보다는 차라리

“항상 죽음을 생각하는 자는 모든 것을 쉽게 비웃을 수 있다”는 라틴어 속담이 메멘토 모리에 가깝다. 

내 경우에도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더 가벼워진다. 

죽음은 삶을 객관화 시키는 거울이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는 1609년 평화조약과 함께 독립하게 된다. 

이때 네덜란드는 카톨릭을 배척하고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신교가 중심이 되었다. 

구교에서 큰 역할을 했던 종교화는 자연스레 금지되었다.

 교회나 왕실, 귀족들의 성화 구입이 없게 되자 자유로운 주제가 작품속에 구현되었다.

 국제 무역을 통헤 부자가 된 상인, 즉 신흥 부르지아 계급들이 그림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이 때 화가들은 개인들이 쉽게 구매할 수 있는 다양한 주제로 작은 크기의 그림들을 그렸는데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 중, 가장 대표적인 정물화가 바로 <바니타스 정물화>였다.

 화가들은 섬세하고 정교한 필치로 인생의 허무함을 상징하는 대상들을 화폭에 담았고

 지식인들이 모인 살롱에서는 화가가 출제한 알레고리에 대한 문제를 풀면서 지적 유희를 즐겼다. 

 바니타스 정물화의 대표 격인 하르멘 스텐베이크의 <인간생활의 허영>으로 작가가 숨겨놓은 알레고리를 한번 풀어보자. 

이 오래된 작품을 보며 마치 오래전 플랑드르의 지식인들처럼.... 


알레고리의 시작은 빛과 어둠이다. 

빛은 생명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지만 그 빛 때문에 죽음으로 형상되는 어둠의 존재가 생겨난다. 

고요하고 적막해 보이지만 강렬한 대비로 인해 구원과 멸망의 관계를 표상하는 것 같기도 하다. 

대각선으로 나누어진 화면 분할 역시 존재와 무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가운데에 있는 황금빛 향로는 불이 꺼져 가는 상태다. 가느다랗게 솟아나는 아스라한 연기는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안보일 정도이다. 

크로노미터, 옛 시계의 모습과 궤를 같이하며 생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한 때를 벗어날 자 그 누구랴,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는 전도서 말씀이 저절로 떠오른다. 

 틀림없이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타서 낡은 듯한 책들은 이 책의 주인이 진리를 탐한 사람이라는 표식이다. 

메모지가 꽃혀 있고 책은 많이 들춰봐서 구깃거린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앞은 전도서고 뒤는 옵기의 한 구절이다. 

 가장 크게 그려져 있는 놋쇠 항아리는 술을 담았던 그릇이다. 

저 안에 가득 담겼던 술은 인간을 취하게 만들겠지만 결국 날이 새면 그는 맨정신으로 더 깊은 슬픔에 빠질 것이다. 

바로 그 곁에 류트로 보이는 악기는 눕혀 있고 오보에와 피리도 보인다. 

술과 악기는 사람의 쾌락을 나타내주지만 결국 술은 마셔서 사라지고 음악 역시 엎어지고 사라지고 말 거라는 것을

 그림속 반 쯤 숨겨진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본도와 조가비 그리고 탁자 위의 비단은 당시 부자들이 선호하는 진귀한 수집품으로

부와 풍요를 상징하면서도 다른 이면으로는 인간의 탐욕을 의미하고 있다. 

“사람은 세상에 올 때처럼 빈손으로 갈 것 뿐이라. 바람을 잡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전도5,15).

 유한한 삶을 보여주는 알레고리 속에서 분홍색 탁자보는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내주는 것일까, 

해골은 정 중앙에서 선명한 빛의 세례를 받으면서 어느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다.

 더군다나 저 해골은 턱조차 빠져있다. 

평생 행동은 없이 쓸데없는 허영의 언어만 내뱉은 사람의 모습일까, 

 '바니타스 정물화'를 소유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집의 주인이 부유하면서도 신앙심이 깊은 칼뱅주의자이며 교양을 쌓은 인텔리겐챠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회적 언어를 품고 있었다. 

성경, 특히 전도서를 그림으로 옮겨 놓은 작품이다. 

 삼월! 큰일 났다! 봄이 왔다! (교계신문 연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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