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배
<풍경의 깊이> 속에서 어제 하루를 살았다.
글을 읽고 생각하면서 그림을 보고
그림과 글이 거의 반반 있는 책이다.
책에 빠졌는지 순식간에 오후 한 시가 되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또 ...
이러니 하루가 눈깜박할 새다.
외출하지 않아도 어쩌면 이렇게 시간이 잘 가는지
책 속의 그림을 보며 아이구 좋다. 맘에 든다. 혼잣말을 한다.
그는 자신의 호를 老野 늙은 들판이라고 했다.
사람과 달리 매해 새로워지는 땅인데....싶으면서도 작가의 삶에 빗댄 말이려니 싶다.
그리고 노야라는 작품이 나온다.
꿀풀일까, 꽃향유일까, 그냥 보라색 꽃무더기.....로 해도
꽃들에 대한 사랑이 엿보인다.
사랑한다는 고백이 오히려 사랑의 질을 떨어트리듯이
섬세함이 없어서 오히려 뭉근한 것,
하얀 별처럼 보이는 것은 물매화다.
어느 작품에서는 그냥 산꽃 했다.
산의 꽃이겠지만 살아 있는 꽃을 말함도 되겠다.
실거리꽃은 꼭 집어서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니,
위: 옴부리 , 치솟음 , 아래 :풍천. 더 아래 불인
백록담, 파도 그리고 바람인데,
백록담을 넘어서서 사람에게 다가오고
파도는 미치 빛이라도 되듯 날카롭게 서서 사람과 대면한다.
바람의 하늘은 아예 보는 자를 품어버린다.
빛을 그리는 그의 방식은
파도에서든 하늘에서든 폭풍설에서든 다 비슷하다.
상처로 빚어낸 진주처럼 그렇게 빛나며 산화한다.
그런데도 자신의 그림속에 아직 형태가 남아있다고
그것도 많이 남아 있다고,
그렇다고 일반적인 추상을 말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추상에서 상 코끼리 상이니까,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거라고,
어떤 기의 흐름을 추출해 내는 것이 추상이라고, 압착 정유 향기를 추출하는 것,
생각해보면 인문어들은 거의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어서
자기만의 언어로 해석해낼 수가 있다.
그는 추상을 혹시 단순함으로 인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눌해져야 하는데 일흔 넘은 추사의 서툰 글씨처럼... 그래야 한다고 쓰는 것을 보면, .
피카소도 그랬지 아이처럼 그리기가 어렵다고....
그러니 고수들은 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파고들수록 거기 남은 것은 지극히 단순함....
<불인>은 <도덕경>의 ‘천지불인(天地不仁)’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늘과 땅은 인자하지 못하다는것,
인간이 좋아하는, 선이라 여기는, 어짐이 자연은 아니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사람의 어짐과 자연의 어짐 사이에는 무수한 다름이 있다는 작가의 시각일 것이다.
무차별한 북촌 살인사건을 그렸는데 불에 그을린 나무, 희미한 불꽃과 연기, , 그의 그림....속에서 아픔과 고통, 제주 사람이 겪을 한이 올올이 되살아난다.
폭풍칠 때 찬바람 불 때 어스름할 때가
이게 진짜 제주다
그렇다면 나는 진짜 제주를 한번도 본적이 없다.
문득 진짜는 그렇게 숨겨져 있는 것인가,볼수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게 진짜인가,
이런 팽나무 한그루 벽에 키우고 싶다.
슬쓸하고 고독한 나무 그래서 아름답고 그래서 강인한 나무
힘들 때 마다 바라보면 힘을 줄것 같은 나무,
나도 사니 너도 살아 할것 같은 나무
그 나무 아래 까마귀도 키우고 싶다.
무엇보다 저 하얀 무심한듯 하지만 자세히 바라보고 있는 한라산과 함께 살고 싶다.저 존재하는 모든것들은 하나의 색으로 화해간다
<이승과 저승 사이>는
기실 사이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죽어있는 자는 오히려 편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서 죽음을 보는 자는
살아 있는 삶이 아니다.
그는 개념의 명목 아래 철학자를 흉내 내는 풍조를 경계한다고 했다.
아마도 자신의 그림에서 끊임없이 철학의 존재를 찾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경계의 말.
바람일까, 움직임일까, 빛남일까, 어둠움이기도 하고 빛이기도 하며 침묵의 소리일수도 있다.
그의 바다도 덩어리다.
그의 하늘도 덩어리다.
바람도 덩어리고 돌은 원래 덩어리였다.
그런 무수한 덩어리들이 서로를 향하여 질주한다.
합하기 위하여
엄청난 상처나 고통을 무서워 하지 않고 서로를 향하여 간다. 사랑이라고 본다.
그림 살 돈은 없고
책이라도 사야지 강 요배의 <풍경의 깊이>를 읽으면서 프리모 레비가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