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초상>
딸과 대만을 갔을 때 우리의 여행지는 주로 미술관이었다.
마침 타이베이 미술관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전시가 있었다.
우리 돈으로 2000원 정도, 타국의 사람 없는 미술관에서 나는 한문을 딸은 영어를 해석하며
서로 도슨트가 되어 그의 그림을 흠뻑 마음속에 담았다.
이리 좋은 전시회라면 우리나라에서는 15000원 정도일 텐데.... 이렇게 싸도 사람이 없다니....
속으로 대만의 민도를 생각했던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국립미술관도 가격은 저렴하고 전시회는 A플러스다.
언제 방문해도 실망하지 않는 곳.
서울 과천 청주 덕수궁 그중에서도 덕수궁은 이미 그 장소만으로도 최고다.
서울 시청 앞이라는 복잡한 도심에 오래된 나무들과 함께 하는 그윽한 정원은
그림 볼 마음에 적요함까지 덧입혀준다.
모란 순이 꽃처럼 붉게 피어오르고 진달래도 분홍 꽃잎을 아주 조금 내밀고 있었다.
석어당에서 한참 서성이다가 예약 시간이 되어 미술관으로 갔다.
일제 강점기 중 가장 짙은 어둠이었을 1930 –40년 동안의 예술이 펼쳐졌다.
입구에서부터 미소가 나왔다.
<모던 금강 만이천봉>이라는 타이틀의 황정수가 그린 ‘별건곤’의 표지화가 있었는데
자그마한 산등성이에 自殺場과 決鬪場이 있다.
1933년 7월호인데 CAFE나 ‘다불ㅅ베드’가 함께 있는 HOTEL은 실제 영어로 적혀있다.
냉면屋, 금강酒, 理髮, 消化藥-信丹, 파라마운트-映畫는 한문으로 적혀있다.
어디선가 읽은, 지식인들은 자기 나라말을 경시한다는 글귀가 생각났다.
등이 달려있고 여자가 설핏 보이는 賣笑樓라는 간판은 은유적이면서도 직설적이다.
좀 더 높은 곳에 BAR가 있고
가장 높은 곳에 예배당이 있었는데 '천당이 갓잡다'라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서술이 필요치 않은 단순 명료함이 놀랍고 즐겁다.
‘친구의 초상’을 만났다.
구본웅이 친구인 이상을 그린 작품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니어서 식구들 사진을 패스포트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그런 상냥함이 내겐 없었다.
그런데도 내 이십 대 때 문학 사상지에서 오린 누런 갱지의 <친구의 초상화>를 오려서 품고 다녔다.
그림의 독특함 때문이었을까, 이상 때문이었을까,
구본웅은 한국의 로트랙으로 불린다.
명문가 출신으로 신체적 결함을 지닌 채 예술 속에 살았던 삶이 로트랙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단편 날개의 이 대목을 읽으면 정말 유쾌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 유쾌함은 금방 슬픔으로 환치된다.
이상의 글은 지금도 여전히 설왕설래다.
글만 천재가 아니라 실제로 이상은 자신이 그린 자화상으로 미술전에서 입상한 실력파이기도 하다.
구본웅은 어느 날 이상에게 자화상을 그려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델을 선 이상에게 파이프를 권한다.
담배를 안 피우는 이상에게 자신의 파이프를 권한 것은 화가 자신을 대입한 것이었을까,
그래선지 혹자는 이상의 자화상에 구본웅 자신을 담았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구본웅은 우선 바탕색을 흑녹색으로 가득 칠한 뒤 작품을 시작했다고 한다.
녹색 계열의 옷과 살짝 얹힌 모자,
코는 선뜻하고 입술은 붉다.
실제 이상의 본모습과는 다르게 눈매를 날카롭게 표현했다.
거친 붓질이 날카롭고 어두운 색채에 힘을 더해 준다.
잘 아는 후배이자 찬한 벗이기도 했던 이상을 그리며 구본웅은 그의 내면을 어느 누구보다 깊게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야수파이자 표현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구본웅은 이상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겉이 아닌 내면을.
이상이 아닌 이상이 처한 부조리한 사회를 더 많이 의식하지 않았을까,
정면상처럼 보이지만 시선은 정면을 비껴있다.
이런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억눌린 분노가 보이기도 한다.
지식인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보여줌과 동시에 작가가 바라본 시절의 어둠도 함께 했을 것이다.
<친구의 초상>은 시인 이상을 강렬하게 보여줄 뿐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도 대표작이 되었다.
이상이 ‘제비다방’을 열었을 때 구본웅의 ‘나부와 정물’과 함께 ‘친구의 초상’도 나란히 걸려있었다고 한다.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시는 네 가지의 주제로 열리고 있다.
문학과 미술 여러 예술 사조를 보여주는 1 전시실을 지나면
신문과 삽화ㅡ이광수가 연재하던 흙은 이상범의 삽화로 이루어졌다ㅡ를 통해 인쇄 마술을 보여준다.
자료 앞에 작게 달려 집중하게 만드는 등은 친절하고 사려 깊다.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영웅'이라고 이태준이 찬사를 했던
그 시절 아름다운 책들이 2 전시실에 있다.
3 전시실에는 문인과 화가들의 만남
4 전시실에는 화가지만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작가들의 글과 그림이 있다.
문학과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더없이 만족한 전시였다.
아우라가 풍기던 구본웅의 원화 ‘親舊의 肖像’을 만나다니!
1928년 이상이 그린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