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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Feb 10. 2021

벚꽃이 보이던 날

세 자매


동갑내기 친구가 남편에게 ‘이 영화 보자’고 했더니 ‘위영과 봐’ 했다고, 

세 자매는 벗의 남편과는 안 어울릴 것 같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깔깔거리고 웃었는데 

웃음이 좋아선지 친구가 라디오에서 나오던 거북이와 코끼리 아재 개그를 말했다. 

토끼 왈 야 너 가방을 왜 그리 낑낑거리고 매고 다녀,

거북이가 그랬다. 너는 머리나 좀 묶고 다녀, 

토끼귀를 머리로 형상화한 것도 재미있었고 기다란 귀를 묶는 연상도 재미나서 한참 웃었다. 

나도 한마디 했다. 

나이 든 부부를 촬영하던 사람이 남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한참 생각하던 아내, 로또요,

어머나 남편이 그렇게 좋으세요? 아내 왈 맞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반전이네, 친구는 즐겁게 웃었다.   

  

가성비 좋은 솥밥 집에서 점심을 먹고 숭늉까지 마셨다.

따끈한 솥에서 밥과 어우러진 숭늉 맛을 아는 나이, 

브루클린으로 가는 비상구처럼 우리는 노년으로 향하는 비상구 앞에 서있다. 

그대 허리는 반듯한가, 턱은 살짝 당겼는가, 배에 힘은 주었는가,

아무렇게나 걸어도 되는 걸음을 걷고 살아왔는데 

이제 걸음에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켜야만 되는 나이,     

차가운 날씨였지만 햇살 아래쪽에서는 봄기운이 배어 있었다.

아아 그리운 봄, 

봄을 그리워하다 보니 문득 눈앞이 벚꽃이 가득 찬 길로 변했다.

그러니 영화 속 시간의 전환이야 말로 리얼리즘이다.

    

커피 맛있는 곳으로 소문난 집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둘이 마셨다.

건물 위가 영화관이고 사람이 워낙 많아선지  한잔만 시켜도 눈치를 보지 않는 집이다.   

커피를 무척 좋아하지만 우린 둘 다 커피 양이 적다. 

쓰고 향기롭고 로맨스가 담긴 커피는 서너 모금이면 족하다.

거기서 멈춘 채 커피를 음미하는 것이 내가 커피 마시는 방법이다. 

그다음부터는 커피가 아닌 음료가 된다.

물론 이야기 중에 차게 식은 커피 몇 모금도 좋다.

좋은 커피는 식어도 향기롭다. 

사랑도 그럴까, 아마 그럴 것이다. 

식은 것이 늙은 거라 친다면... 늙음도 그렇게 향기로웠으면 좋겠다. 

늙을수록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어야 좋은 커피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외로움을 공원 햇살과 그 벤치 위에 함께 앉아 식어 빠진 늙은이들의 체온으로 덮인다? 

그러면 너무나 늙음이 누추할 것 같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도 의연할 수 있는 늙음을 나는 바란다.

그 혼자를 즐길 수 있는 늙음을 위해 나는 애쓸 것이다.

외로움을 독서로 채우고 쓸쓸함을 思考할 것이다.  

글로 인생을 성찰하며 기도로 타인들에게 사랑을 베풀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비장한 것은 비상구 앞이고 봄을 지척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던 날, 김혜수 주연의 영화를 보면서 


여전히 아직도 한국 영화는 힘을 못 뺐네, 생각을 했다.. 

세 자매도 그런 과장된 부분이 보이긴 했다.

특히 막내... 글쓴이로 나오는 그러나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 

실패와 자조 속에서 살아가는 그녀가, 그녀의 욕이 , 태도가 좀 그랬다. 

그러나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는 ‘생활인’인 남편의 쉰 냄새나는 ‘생활’이 

그녀의 과장을 지우고 그녀를 현실에 발붙이는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냈다. 

어쩌면 세 자매 중 가장 주변부라 할 수 있는 막내의 삶이 그 영화의 방점 같기도 했다. 

새엄마를 똘아이라고 지칭한 아들을 때리는 남편을 사정없이  때리는.... 대목에서 웃었다.  

감독은 영리해서

효정이 좀 태워주세요. 

교회 지휘자인 문소리가 남편의 차로 솔리스트를 밀어 넣는 장면을 

서늘하게 그러나 일상적으로 연출했다.  

구구절절 설명을 생략해서 세련돼 보였다.

모든 것이 미안한 큰 딸.... 세상이 그녀에게 미안해야 할 텐데 착한 여인의 고통은 어디에서 기인됐을까,   

세 자매의 근원인 가정, 

또 가족 간 성폭행? 걱정하며 봤는데 다행히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무지한 아버지의 폭력과 변화에 대한 설명을 가느다란 한 가지 살짝 꽂았다면 좋았겠다. 

하긴 감독은 아버지의 피 흘리는 이마로 설명을 다 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기도 하다. 

일목요연과 논리를 스토리에서 원하는 것은 

여전히 '라테는 말이야' 소산일 것이다. 

어디 인생이 그리 논리적으로 진행되던가, 

그러니 결론적으로 이 영화 그런대로 괜찮다.

볼만하다. 

별 네 개는 줄 수 있다.

영화 보는 동안 집중해서 봤다. 

그런데 나는 거의 모든 영화를 집중해서 보니까 윗 문장은 쓰나 마나 한 문장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

옛 식당을 찾아가고 

그 식당은 문을 닫고 

바닷가에서 셀카를 찍는 

그 아무렇지도 않은 끝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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