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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l 25. 2016

코펜하겐

연극적인, 매우 연극적인 연극

무대가 복잡할 필요는 없다.

(삶이 그러하듯이)

역으로 뉘여 진 삼각형과 의자 셋 그리고 세 사람이 전부다.

3이라는 숫자가 주는 느낌은 언밸런스 자체이면서도 그래서 미묘한 조화로움이 있다. 

하나보다 외롭지 않고 둘보다 딱딱하지 않고 뭔가 3은 너그러움....이 있는 숫자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희곡 배우 관객’ 이라는 매우 단순 느낌의 연극 요소도 3이다.  

(기실 삶도 아주 간결하다.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의  나)    

대학로 연극이 다 젊은이들 취향이라서 

(젊음을 폄훼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며칠 전에 ' 트루 웨스트'를 딸과 함께 보고난 후에는 무엇을 놓친 것처럼 허망했다.

연결 즉 논리가 없는 행위들....

행위들에서 당위성을 찾는 것이.. 촌스러운 인식인가.....

연극에서도.....혹시 무논리...가 새로운 사조로 등장한 것인가.

(다수를 향한 묻지마 폭력과 궤를 같이 하는 건가) 연극 보고 난 생각이 

바야흐로 횡설수설이었다.  

    

<코펜하겐>은 전혀 달랐다.

그 시작부터가 매우 연극적이었다. 

관중석에서 무대로 등장하는 세 사람, 死者다.

죽음이라는 신묘막측한 간격을 서슴없이 비집고 들어선다.

연극만이 가능한 대목이다. 

거기다가 쫀득거리는 대화가 차지게 연결된다.

고급(?) 향수가 틀림없을 흔치 않는 향기가 소올솔 스며드는 지적인 대화라는 표현이다. 

대화는 머릿속을 쉼 없이 강타해서 고추선 허리는 저절로 고정된다. 

한마디라도 놓치면 이해불가가 될 수 있다는 긴장감을 

희곡은 관객을 가지고 놀듯이(?) 쉴 새 없이  던진다.  


무대 위 세 사람은 배우가 되었다가 관객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은 지문이 되기도 한다.

전혀 균형과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역삼각형은 오히려 연극 안에서 

어느 누구보다 안정적이다. 

배우를 바라보고 있는 섬세한 풍경이다가 

벚꽃잎 떨어져 머리위에 앉듯 가볍게 배우에게 몸을 내주는 칠판이 된다.

조명 하나가 살짝 바뀌면 삼각형 안의 삼각형은 *유영국의 그림 산이 된다. 

역삼각형 아래 의자 셋은 

비어 있을 때도 두 사람이 앉아있을 때도 두 개가 비어있을 때도 

표정 깊은 배우처럼 절묘한 상황을 나타내주고 있다.      

배우가 움직일 때도 

의자는 마치 예의를 잘 지키는 신사처럼 단정하고 그가 내는 느낌은 풍성하다.  

   

‘코펜하겐’은 실제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이다. 

그 배경은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때

세계 물리학계의 두 거장이 만나다.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한 하이젠베르크와 상보성 원리를 발표한 닐스 보어

그들은 마치 부자사이와 같았던  사제지간이다. 

그러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긔고 그동안 덴마크는 독일에 흡수되어 버렷다. 

연극은 그 하루의 이야기.

(하루이지만  그들의 전 생애를 관통한다)

당시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핵분열 프로그램을 지휘하는 책임자가 됐고, 

보어는 점령국의 반 유대인으로 독일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하이젠베르크는 왜? 독일의 침략국이던 적의 나라 덴마크의 옛날 스승을 찾아왔던 것일까?

연극은 그 답을 찾으려는 시도로 시작된다.    

  

작가는 세 사람의 대화 속에서  

‘불확정성 원리’와 ‘상보성 원리’를 녹여내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원리를 삶의 방법론으로도 절묘하게 발효시킨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그야말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내용이고,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상호 보완한다는 원리에 대한 이야기다.

 “입자는 파동으로도 관찰된다. 

하지만 입자나 파동, 둘 중 한 가지 방식으로만 관찰할 수 있다.”(보어의 ‘상보성 원리’) 

입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낼수록 운동량은 불확실해진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삶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이야기와 

그럼에도 서로에게 반응하며 환경과 상황이 변화한다는 보어의 이야기는 

그들의 관계만큼이나 철학적으로도 팽팽히 맞선다.     

그러나 극 후반부에 가서도 왜? 하이젠베르크가 보어 박사를 찾아온 이유에 대한 

선명한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아니 극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왜? 에 대한 답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 든다. 

이 연극의 가장 정점이거나 혹은 매혹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마치 인생의 답이 없는 것처럼) 

다시 또 다시, 답을 찾기 위하여 

그들의 만남은 자꾸만 반복된다. 

 반복될 뿐 아니라 실제 다른 각도의 시선들이 펼쳐지기도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정말 보어와 관련이  있던 미국의 원자탄 비밀을 캐내려고 한 것일까,

아니면 독일이 아직 원자탄 개발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일까, 

혹시 독일과 미국의 원자탄 연구를 같이 지연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을까,

정말 하이젠베르크는 핵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독일 정부에 그것을 알리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보어의 아내 마그레타가 지적한 것처럼 이미 초라해진 스승의 상황을 보며 

독일에서 탄탄해진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왕성한 연구열에 대해서 스승의 확인을 받고 싶엇던 것일까. ,   

사람을 해치고야 마는 핵에 대한 연구에 

과학자의 윤리는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 것일까, 

오히려 핵의 완성을 도왔던 보어 교수의  행위와

연구에만 정진하는 광기조차 엿보이던 하이젠베르크

과학 지식에 대한 언어들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사이

자신의 삶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탄식처럼 되뇌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바로 그 지점이 답이었을까, 

모든 것은 결국 불확실하다는....   

 

어느 것 하나 명료하지 않는 연극

그 답 없는 연극이 주는 쾌활함. 선명함, 즐거움이라나.... 

기묘한 일 아닌가.

지금 어딘 가에서는 테러의 여진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가득한데

무대위에서는 산사람이 죽은자를 연기하고 있다는것,

에어컨디셔너를 시원하게  틀고 다니다 차를 내리면 뜨거운 차의 열기가 다가온다

결국 ‘나의 쾌적함’을 위하여 수많은 열기와 공해를  나 없는 곳으로,

내게 닿지 않는 곳으로 버리는 것이다.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면서 그곳을 덥히거나 더럽힐,

    

작가 프레인은  말했다. 

‘삶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기묘하다 

작가는 아마 사람의 행위를 해석하는 수많은 동기...모티브...그 다양함으로부터 오는 불확실성에 주목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이 불확실성은 무수하게 다양한 길(해석, 발견 추론등 )이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모티브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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