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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May 20. 2021

거리의우울과 신비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

   

                                        거리의 우울과 신비The 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1888∼1978)    



어젯밤 하늘은 더할 수 없이 짙은 블루였어요.

비 온 뒷날이었고 가시거리 좋았던 낮의 여파였을 겁니다.

밤도 낮 못지않은 색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특히 가로등 아래 서서 나무 위를 쳐다보면 불빛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색은 다르고,

위여서 혹은 아래라 형태는 얼마나 가지가지인지,

모이고 흩어지며 셀 수도 없는 이파리들이 저마다의 풍경을 이뤄내고 있죠.

가느다란 가지가 보이지 않는 쪽동백나무의 잎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느티나무 몸통에서 불쑥 솟아난 새 가지의 나뭇잎들은 유별나게 커서 미소를 짓게 됩니다.

일렁이는 촛불 곁ㅡ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귀밑머리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가로등 불빛 아래 나뭇잎들도 어여쁘죠. 

오늘은 내가 그들과 눈 마주치지만, 내일은 또 다른 이에게 또 다른 풍경을 느끼게 하겠지요.

혹 누군가 보아주지 않더라도 그들은 전혀 괜찮습니다. 


 <거리의 우울과 신비>입니다.

그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숨겨진 의미가 무엇일까를 저절로 생각하게 됩니다. 

멜랑코리를 우울이나 우수로 번역합니다만 둘을 섞어 느껴도 될 듯 합니다.

키리코는 그리스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화가로 이십 대 초반 파리 여행을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피카소와 브랑쿠시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만나게 되고

그 영향을 받아 환상적이고 독특한 키리코만의 화풍을 장착하게 됩니다.

인위적이며 장식적인 초현실주의의 기법 ‘데 페이즈망’의 시작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는 매우 현실적인 사물들을 간결하게 그렸지만 간결함 속에 미묘한 신비로움이 존재합니다. 

평범한 장소 속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물을 병치시키는데 놀라운 부조화와 함께 초월의 경험을 하게 합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사물의 배후에 있는 형이상학적 영역을 보았어요.

그래서 초현실주의자들의 대부 앙드레 부르통은  

<사랑의 노래>를 우러르며 키리코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추앙했습니다. 



 눈부시게 환한 날이지만 적막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희디흰 르네상스 건물은 환한 햇살 속에서 투명하게 드러나 있고 오른쪽 어둠 속 건물은 지나치게 어둡습니다. 극명한 대비 속에서 과장된 원근법과 모순된 소실점은 뭔가 일어날 것만 같은 두려운 스멀거림을 줍니다. 

키리코는 일차 대전 때 입대하지만 신경쇠약으로 거의 모든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의 섬세한 신경은 고향에 대한 향수로 가득했겠지요.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의 건물들을 그렸을 것이고

고대의 궁전들은 그의 작품 속에서 미스테리한 모습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사람이라고는 소녀뿐입니다. 그래선지 무채색의 아이는 살짝 그림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소녀가 혼자 굴렁쇠를 굴리며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습니다. 

굴렁쇠 소리가 오히려 정적을 더 할 것 같습니다.

문이 열린 마차의 짐칸은 엄둠속에서 웅크린 동물처럼 자리하고 있다가 아이를 삼키기라도 하려는 걸까요.

소녀 앞의 그림자,

그 아이를 향해 다가오는 혹은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어둡고 음산한 그림자가 있습니다. 

저 멀리 있는 깃발은 펄럭이면서 우리의 불안을 가중시킵니다.

키리코는 자신의 작품에 깃발을 많이 그려 넣었어요.

혹시 인간의 생명력이 깃발의 움직임 정도라고 생각한 걸까요. 

저항할 수 없는 삶의 혹독함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저 미미한 깃발의 움직임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노란색 길과 초록색 하늘 역시 범상치 않습니다.

부조리한 현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현대인의 우울하고 우수에 찬 삶의 한 단면을 저 거리에 담았고

삶의 불연속성과 미래에 대한 불안, 현실에 대한 강박을 한 공간에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죽음이 한순간에 이루어지지만 영원한 이별이듯이

작가의 삶에 포착된 인생의 한 단면이 삶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소녀가 곧 부딪히게 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우리는 이미 탑승했습니다. 

과거의 향수? 현재? 미래? 이 작품의 시간은 어디쯤일까요? 


 예술 작품의 불멸에 논리나 상식은 필요치 않다고, 키리코는 말했어요.

미래주의 이후 이탈리아를 휩쓸었던 '형이상회화‘파를 만들기도 했던 그는 차츰 보수적인 화풍으로 돌아가 라파엘, 루벤스등을 모사했습니다.

이십 대 빛나는 시절의 영화도 그에게서 점차 사라져 갔죠.

작품의 년도를 다르게 써서 이미지가 실추 되기도 했고 초현실주의의 배신자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산엘 가면 가끔 죽은 나무를 만납니다.

모두 새순을 내는데 그렇지 못하면 죽은 나무일 거로 생각하죠.

그러나 정말 죽은 것일까요, 꼿꼿하게 서서 버티는 모습 어디에도 죽음은 보이지 않는데요.

국립수목원 에코 트레일에 가면 사나운 태풍에 뿌리뽑힌 나무들이 많아요.

죽은 것일까요?

그 몸에서 새 가지가 나고 새순이 나는데요.

죽음은 우리에겐 허락되지 않는 경험으로 평생의 관념이지만

나무는 죽음을 새로운 각도로 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학이 하는 일이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라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생각하게 하는 그림을 보지 못한 것도 혹시 소외라고 할 수 있다면

이 글도 당신과 나 사이에 아주 짧은 징검다리라도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교계신문 연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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