쟝 밥티스트 샤르댕 (Jean-Baptiste-Siméon Chardin
‘식전의 기도’는 참 아름다운 그림이다.
젊은 엄마와 어린 자녀들이 자그마한 방에 식탁을 앞에 두고 있다.
분명히 나도 저렇게 아이들과 식탁에서 밥상을 차려놓고 아이들을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나온 세월이지만 그때는 전혀 몰랐었다.
아이를 뱃속에 품고 낳고 기르는 것이 몸으로 하는 일들 중 최고의 정점 이라는 것을,
그 때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시간과 내가 지어낸 작품이라는 것을,
그러니 이 작품은 나의 지난 시간처럼도 여겨진다.
올해 아흔여섯 살이신 울 엄마 허순덕 권사님도 그림 속 여인처럼 젊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선연히 기억하는 한 장면,
엄마는 부엌에서 김 오르는 밥솥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나무 주걱으로 십자가를 그었다.
이 밥을 먹고 온 가족이 건강하게 해주소서.
말하지 않아도 행위로 하는 기도였을 것이다.
기억속 엄마도 젊고 나도 젊고 그림속 여인은 내 딸처럼 젊다.
아름다움은 시절이 주는 은혜일지도 모른다.
젊은 엄마와 사랑스러운 두 아이가 식탁 앞에 앉아 있다.
혹자는 정면에 있는 어린 딸을 아들이라고 보기도 한다.
아이의 의자 뒤에 걸려 있는 북과 아무렇게나 던져 있는 북채로 인해서,
벽에는 자그마한 선반이 있고 그 선반 위에 일상에 필요한 그릇들이 놓여 있다.
의자 뒤 어둠 속에도 협탁이 있고
그 위에 접시와 물병이 근엄(?)한 자세로 놓여 있다.
방은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사람에게로 향하는 빛은 온화하고 부드러워
방안의 정경이 환하고 따스해 보인다.
식탁은 소박해서 스프가 담겨있는 접시뿐이다.
의자가 셋, 아빠는 함께 살고 있지 않은 듯 하다.
어디로 갔을까, 전쟁터에 갔을까? 장사하러 먼길을 떠난 것일까,
어쩌면 아내와 어린 아이 둘을 남겨놓고 세상을 하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저 젊은 여인의 표정속에 뭔가 슬픔이 어려있는 것 같다.
국자 속 달걀 두 개는 다음 끼니를 위해 남겨둔 것일까,
큰 아이의 표정은 썩 그리 좋지 않은 듯 하다.
아이참 맨날 멀건 국물이야, 이딴 것 먹기 싫어, 이런 것 먹으면서 기도해야 해?
속으로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 아이는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고 있다.
늘상 하던대로 우리에게 좋은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기도를 했을까,
아니면 하나님 맛있는 음식 좀 주시면 안 돼요?
저 이런 멀건 스프 먹고 싶지 않아요 투정 기도를 했을까?
젊은 엄마의 표정이 참으로 미묘하다.
주님 이 아이의 기도를 들으셨지요?
우리 아이들을 축복해 주세요. 아이의 기도가 대견한 것 같기도 하다.
주님 아시죠? 아이들의 천진함을,
아이의 솔직한 기도를 들으며 민망해서 속으로 아이를 대신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날마다 반복되었을 식탁의 풍경을 저리 우아하고 위엄있게 그려내서
순간을 영원으로 삼은 작가의 시선이 경이롭다.
더군다나 샤르댕이 살았던 시기는 18세기 말로 화려한 로코코 풍의
궁정이나 귀족들의 삶의 양태만 작품이 되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소박하고 초라한 일상이 작품이 되리라고는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샤르댕은 스쳐 지나치는 소소한 생활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놀라운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그래서 약간의 멸시가 동반된 ‘동물과 과일을 그리는 데 재능 있는 작가’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말년의 세잔이 인상주의 화풍에서 점차 멀어지면서 200여점이나 되는 정물화를 그렸다.
그리고 그가 그린 사과가 세상을 바꾸게 되었다.
샤르댕의 정물 없이 세잔의 정물화는 태어날 수 있었을까,
이런 샤르댕을 아름답고 매혹적인 표현으로 다시 보게 한 것은 프루스트였다.
그의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샤르댕이 당신에게 자신만이 느끼는 비밀을 고백하는 것을 보고, 정물들은 이번에는 당신에게 더 이상 그들의 아름다움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정물은 이제 살아서 생명을 띠게 된다. 정물은 인생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당신에게 전할 이야기들,
빛을 발하게 될 영광, 베일이 벗겨질 비밀로 가득하다.
만약 며칠 동안 샤르댕의 그림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면 당신은 일상에 매료될 것이며,
회화의 삶을 이해하고, 더불어 삶의 아름다움을 쟁취하게 될 것이다.”
1860년에 에콜 프랑스 (L'Ecole française)에 총 41점의 샤르댕의 정물화와 인물화가 전시됨으로써
처음으로 샤르댕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평론가 데니스는 그가 팔레트에서 그라인딩 하는 것은 색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이라고 했고
그가 붓끝으로 캔버스에 고정시키는 것은 공기와 빛이라고 했다.
1863년 공꾸르 형제가 예술잡지 가제트에 샤르댕에 관해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샤르댕은 19세기 말에 프랑스 화단에서 재발견 되었으며
그 때 샤르댕의 작품을 많이 구입했던 루브르 박물관에는 지금도 샤르댕의 코너가 있다.
샤르댕은 과장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며
작품 전반에 일관적으로 흐르는 균형 감각을 중시했고
그래서 그의 작품은 조형적인 면에서도 지극히 아름답다.
다른 사람들이 화려한 외향에 미혹되었을 때 오히려 소박한 일상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런 시선을 평생 견지해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해 냈다.
<식전의 기도>는 사람에 대해 저절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정신적인 공감과 따스한 온기가 있는 작품이다.
더불어 어떤 화려한 작품들도 지닐 수 없는 기품과 위엄을 지니고 있다.
작품 앞에 섰을 때 소득이나 즐거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상황인데
허허실실한 기쁨이나 즐거움이 다가온다.
혹은 상실과 고통이 없는데도 아련한 슬픔이 느껴지는 심미적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이 작품도 그렇다.
가끔 기도하다가 정신이 쇄락해지는,
마음이 맑아지고 뭔가 가벼워지는듯, 세상 근심이 사라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
그런 영적 경험은
예술앞에서 다가오는 심미적 경험과 아무런 상관 관계도 없을까?
백석의 시 귀절이 생각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