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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n 15. 2021

국립현대 미술관 서울관


 서울 한 복판에 있는 현대 미술관은 언제 가도 좋다. 

널찍널찍하게 나뉘어진 세련된 공간 속에 새로운 작품들과 오래된 작품들이 적절하게 놓여 있어 

비유해본다면 아주 쾌적한 기분으로 비행기에서 내려 거기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여행의 첫발자국이라고나 할까, 


미술관에 들어 서기전 변함없는 세월을 여일하게 한자리에서 살아온 느티나무 세 그루를 바라볼 일이다.

 마음이 산란하면 거기 아무리 좋은 작품이 있어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니 꼭 느티나무를 보며 ‘세상일 별것 없더라’ 다짐하다가 들어설 것, 

적어도 미술관 안에서라도 심미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연, 특히 오래 산 나무는 울퉁불퉁한 마음을 편편하게 해주는 아주 섬세한 솔이다. 


 MMCA 소장품전에서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친근하고 익숙한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작품과 작가들이 주욱 펼쳐진다. 

언제 봐도 좋은 오지호의 ‘남향집’, 

작가의 어린 딸인 빨간 옷의 소녀와 푸른색 나무 그림자는

 내가 아주 어린 시절 살았던 부엌 대문과 마당의 감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기억은 내 안의 심미적 존재를 터치하는 매우 기능적인 존재다. 

어쩌면 그래서 좋은 예술작품 앞에 서면 

사람들은 자신을 기억하거나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지도 모른다. 


오종욱의 ‘미망인’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거친 쇠붙이의 질감이 고통과 절규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위를 향한 손은 삶에 대한 갈구일 것이다. 

극도로 생략된 모습은 삶에 대한 탐욕은커녕 존재를 위한 갈구,

 그래서 맑고 투명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추상적이다가 초현실로 화하는 어느 지점 같기도 했다. 

저절로 자코메티를 생각나게 한다. 


박수근 장욱진 이중섭 그리고 김환기. 

아무런 생각 없이 다가서도 작품의 생기로 내 안이 차고 넘치게 된다. 

맛있는 애피타이저를 다 먹었는가 했더니 복도에 서도호의 ‘바닥’이 있다. 

원래 바닥이라 밟게 되어 있으나 밟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 차라리 눈높이에 맞추어 보게 했으면 어땠을까, 

이응노의 ‘군중’이 생각났으니 그 둘을 한자리에 설치해도 좋을 듯했다. 

이불의 ‘사이보그’는 하얗고 예쁘지만 슬퍼 보였다. 

한국 현대미술의 주인공인 이불이 자신의 사이보그에 관하여 하얗고 예쁘다 혹은 슬퍼보였다 라는

 이런 촌스럽고 조악한 표현에 아마 질겁을 할지도 모르겠다. 


황재형의 <회천>에는 상당히 많은 작품이 있어 그의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7년여를 그린 그의 작품 ‘백두대간’을 사진으로 찍었더니 가관이라 작품에 대한 예의로 삭제를 했다. 

그는 머리카락을 그 자체의 생명력을 지닌 물질, 삶이 기록된 필름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머리카락으로 먹과 붓을 삼아 광부의 ‘드러난 얼굴’을 그렸다. 

극사실화인 ‘아버지의 자리’와 함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정상화, 

그는 추상을 지나 단색조 추상에 머물다가 종이와 프로타쥬의 시기를 거쳐 격자화에 다다랐고 

이제 그는 모노크롬 앞에 서있다. 

모든 구상을 배제하고 색으로된 세상인 단색화는 이즈음 현대 회화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모두들 단색화를 하는 것일까? 유행이라? 

작가들은 유행을 창조하는 것이지 유행을 따라가는 자들이 아니다. 

현대 회화의 수많은 대가들은 수많은 굴절과 과정과 시기와 현상을 거쳐 

결국 미니멀리즘, 모노크롬, 단색화에 다다른 것이다. 

그들에겐 꼭 당도해야만 하는 목표 지점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복잡한 삶이 펼쳐지고 고난과 질고와 행복이 계절처럼 찾아든다고 하더라도 

결국 삶은 무엇인가, 

생과 사이다. 

그림 속 세상을 지나며 예술에 천착하며 궁구하며 최선을 얻기 위해 

끝없는 사유와 절박한 몸짓을 했을 것이다. 

그런 후에 그림의 시작이 색이며 끝도 색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상화는 아직도 자신의 작품이 <과정>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정상화의 단색화 앞에 서면 그런 생각들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하나의 색이라고? 

거기 아무런 구성이 없다고? 

구성이 없는 구성 속에서 수도 없이 보이는, 다가오는 구성을 어쩌란 말인가,

 한가지 색처럼 보여서 단색화 라는 별호를 얻는 저 작품 속 수많은 색채의 결을 어쩌라고,

 나는 미술관 한쪽 면에 붙어있는 그림 한 장에서  

단순한 색이 단순하게 포진되어 있는 그림 한 장에서 

파도를 보고 너울을 보고 내려다 보기도 어려운 단애의 절벽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의 시간이 보였고 땀과 노동이 느껴졌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틀림없이 의도치 않았을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칼날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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