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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l 20. 2021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카라바조 '이사람을 보라' 1606




미술관은 내가 가장 선호하는 여름철 피서지이다.

더운 날 집을 나설 용기만 있으면 된다.

이른 점심을 먹고 편한 신발을 장착한 다음 지하철에 오른다.

차를 갈아타고 또 갈아타며 미술관에 다다른다.

시원한 실내에 펼쳐지는 작품의 향연,

언제 어느 때 어딜 가도 실망하지 않는다.



지방에 여행을 갈 때도 마찬가지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건물은 크고 시원하며

주변 숲은 깊고 거기 과거와 현재 미래가 우아하게 펼쳐진다.

아주 좋아하는 단어 중의 하나, 借耕을 펼칠 수 있는 곳이다.

감히 생각할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대가의 작품들이 나만의 풍경이 되는 곳,

생각하게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쉴만한 의자에 앉아 멍 때리기에도 아주 좋은 곳이다.



며칠 전 딸아이와 함께 과천 미술관에 갔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전국에 네 곳이다.

서울관과 덕수궁관 과천관 그리고 개방형 수장고인 청주 미술관,

서울관과 덕수궁관은 익숙하지만, 과천만 해도 자주 가질 못한다.

과천 어린이 대공원을 지나 미술관 가는 숲길에 들어서니, 

마치 천국이라도 펼쳐지는 것처럼 한적하고 고요하다.

야외 조각공원을 걷고 싶었지만 너무 더워서 패스했다.

한국 근현대 미술이 잘 정리되어 있었고 그에 반하듯 젊은 모색 2021이 펼쳐진다.

당연히 젊은이들의 작품은 이해하기 어렵다.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는 작품들을 보면 이해하려고 애를 썼으나 이제는 자연스럽게 물러난다.

다가오면 다가오는 대로 설령 몰라서 스쳐 지나가도 괜찮다.

그래 애썼다.

내가 몰라도 누군가가 알아주겠지.

새삼스럽게 미술관에서 작품이 시대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근대와 현대의 차이가 작품 속에서 선명했다.

그리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단순한 문장도....



카라바조의 <이 사람을 보라>는 무려 425년 전의 그림이다.

‘요한복음 19:5-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바로 이 대목을 그린 그림이다.

사도신경은 천지 창조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생애와 미래까지 축약된 

우리의 신앙에 대한 총체적 고백서이다.

그 엄청난 고백 속에 본디오 빌라도가 등장한다.

그는 누구인가,

예배 때마다 만나게 되는 본디오 빌라도 (폰티우스 필라투스 Pontius Pilatus)의 생애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후 26년에서 36년까지 로마 제국의 변경 행정구역의 하나인 유대 지방의 총독을 지낸 것과

성서 속 기록과 몇몇 역사가들이 언급한 그의 유대인 학대 정책들이 전부다.

그는 잔인하고 가혹한 성격을 지녀서 거침없는 횡포를 휘둘렀고

반역자는 법적 판결 심사 없이 처형했다고 한다.

누가복음 13장 1절에 기록되었다시피 그는 학살자이지만 교활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예수를 몇 마디 심문해보고는

 그에게 사형에 처하거나 어떤 처벌을 가할 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고소인인 제사장과 유대인들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눅23:4, 요18:38)라고 선언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고난의 자리로 밀어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손을 씻으며 빌라도가 한 말이다.

유대 총독의 자리를 10년이나 지켰지만

3세기말-4세기초에 활동했던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극심한 고뇌와 심적 갈등 때문에 빌라도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라바조의 정형적인 스타일의 작품이다.

단순하고 어두운 배경으로 세 명의 인물이 클로즈업 되어 있다.

빛은 예수께만 비친다.

가시관을 쓴 이마에는 벌써 핏자국이 보인다.

손목에 묶여 있는 가느다란 끈은 힘보다는 조롱에 더 의미가 있다.

왕의 홀처럼 쥐어진 종려나무 가지 역시 그렇다.

예수님의 피부는 창백하고 눈은 감고 있다.

수용이나 체념을 떠나 고요한 평정의 모습이다.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니 너희들은 마음대로 하라,

채찍을 들고 그에게 홀과 가시관을 씌었을 예수님 뒤의 사람의 표정이 놀랍다.

눈빛을 보이지 않으면서 살짝 벌린 입술과 고도의 음영으로 그사람의 마음을 엿보게 한다.

이런 분에게 이런 행동을 하다니,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알수 없음이 슬픔으로 화하는 시점이라고나 할까,

본디오 빌라도의 이마에 가득한 주름은 그의 고뇌를 엿보이게 한다.

근심과 두려움이 엿보이는 눈이다.

손을 씻었던 것은 두려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응시하지만 눈빛은 예수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에크 호모,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너희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가,

너희들이 오히려 더 문제 아닌가,

어쩌면 그의 두 손은 소리 지르는 대중들을 청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리 오라, 나와 함께 가자, 이분께로 가자,



카라바조는 사람의 감정과 표현, 몸짓이나 태도에 관해 주도면밀하게 관찰했고

작품 속에서 그를 표현해냈다.

죄없이 고통당하는 예수님과 빌라도 그리고 무명의 사람을 등장시켜

그 참혹하고 절절 했던 순간을 포착했다.

스테파노 추피는

‘카라바조의 그림은 현존한다/ 더불어 그를 바라보는 나 자신도 

그의 작품 속으로 동참하게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 그림 속 어느 부분에 속해있을까,

두려운 질문이다

.


코비드 19로 인하여 무수한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비대면 예배라는 생판 처음 보는 단어가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굳이 사람의 눈에 비추어보자면

우리의 예배는 원래 비대면 예배가 아닐까,

잊고 살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눈을 감고 주님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영혼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예배......

그러니 골방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시절이기도 할 것이다.

                                                                               -교계신문 연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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