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드르 보티첼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향해 대장정을 시작한다고 나 자신에게 선포했는데
세상일에 밀려 이제 2권을 읽었다.
사실 마음을 다잡고 읽기 시작하면 이틀이면 한 권 정도는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천천히 읽으려고 마음먹는다.
몸은 느긋하고 마음이 좀 빈 시각을 찾아 읽어야지.
그래야 할 책이다.
문장의 밀도는 깊고 간극들은 넓어서 어느 대목에서는 멈춰 서야만 한다.
더듬거리며 헤매며 삶을 생각하게 하니까,
글이라는 단순한 기호들이 담고 있는 시공간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읽어야 한다.
2권 ‘스완의 사랑’편에서 보티첼리의 ‘모세의 생애’가 나온다.
스완은 명화 속에서 주위 사람들의 특징을 찾아내는 예술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다.
스완의 생각 속에 떠오르는 음악과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그림을 검색하고 음악을 들어가며 책을 읽었다.
스완은 처음 오데트에게 흥미를 느끼지만,
그녀의 천박함도 같이 느꼈기에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시스틴 예배당에 그려진 보티첼리의 프레스코화,
‘모세의 생애’에서 모세의 아내, 이드로의 딸인 십보라가 오데트와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스완의 사랑, 욕망, 질투, 집착이 시작 된다.
부끄럽게도 나는 수년 전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가서 아주 열심히 그림을 보았지만,
보티첼리의 ‘모세의 생애’를 보지 못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만 보느라 천장 아래 창 쪽에 있다고 하는데 보지 못한 눈뜬장님이었다.
이 작품은 메디치 가문의 로렌조가 식스투스 4세 교황과 화해를 하는 의미에서
피렌체 화가들을 보냈고 그들은 시스틴 예배당을 장식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보티첼리도 그중의 하나였다.
중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보티첼리는
세 장면의 그림만 그리고 피렌체로 먼저 돌아왔다고 한다.
보티첼리가 그린 ‘모세의 생애’는 모세의 생애 중에서 중요한 여섯 가지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오른쪽 하부에는 모세가 애굽인을 죽이는 모습과
살인하는 모세를 피해 도망치는 두사람, 그들의 겁에 질린 표정이 압권이다.
성경에는 쳐 죽였다고 하는데 그림 속에서는 칼이다.
그리고 그 칼을 든 채 도망가는 모세가 있다.
작품의 전면에는 모세가 십보라를 만나는 장면이 있다.
바로 곁에는 목동을 몰아내는 용감한 모세가 있고
무성한 나무 아래서 신발을 벗는 모세,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며 무릎 꿇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하여 떠나가는 모세가 그려져 있다.
모세의 생애를 예수님의 삶으로 치환시킬 수 있는 작품,
즉 신약과 구약의 연계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우물가의 모세는 내게 오는 자는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말씀 하신 예수님.
모세의 양과 예수님의 양인 우리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천국으로 비유될 수 있다.
모세는 황록빛 옷을 입었는데 시공간을 초월한 한 화면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모세의 외면보다는 그의 성향을 선명히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참을성 없고, 잔혹한 성격이 빚어낸 살인,
죄에서 도망치는 비겁함이 여성들 앞에서는 자상해지고 목동들에게는 엄격해진다.
신발 벗는 모세는 왠지 뭔가 불평에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꼭 신발을 벗어야만 하나요, 툴툴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고 내 가서 꼭 보리라는 호기심 가득한 성정과 연결되어 보인다.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고 있으면서도 손의 모습은 다르다.
아, 제가 어찌, 그런 일을....
엑소더스 하는 모습도 리더다운 당당함보다는
이들이 내 말을 잘 들을까, 과연 내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걱정에 찬 모습이 딱 우리의 모습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십보라의 모습은 여성성이 가득하다.
모세를 바라보고 있어야 정상일진대 관심 없다는 듯 약간 얼굴을 돌리고 자신의 자매를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온 마음으로 모세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갸름한 얼굴의 곡선과 우아한 옷,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의 웨이브는 보티첼리만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이 많아선지 생각이 강력한 힘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행위보다 생각만 많은 게 아닌가, 생각해서 생각을 격하 시키며 살아왔는데
이즈음에는 생각쪽으로 추가 살짝 기울어지기도 한다.
생각은 삶을 이끌어가는 바로미터가 될수도 있으니까,
사실 800여 페이지의 ‘한 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몇 년 전에 읽었다.
그런데 모든 고전은 마치 인생이라도 되듯
스토리도 아니고 아름다운 문장도 아니며 발췌할만한 사건의 기록들은 더더욱 아니다.
삶을 살아내듯 읽어내야 하는 것이 고전이다.
김화영선생은 제대로 읽으려면 불어로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했는데
불어로 읽으면서 100가지를 생각한다면 번역된 책으로 열 가지라도 생각하는 게 어딘가,
이제 모든 일에 그다지 욕심을 내지 않는다.
가끔 생을 뒤돌아보면서 뒤처진 부분도 괜찮다고,
잘못한 부분도 그래, 거기서 유능했다 하더라도 무슨 다른 삶이 펼쳐질까,
설령 다른 삶이 펼쳐진다고 하더라도 또 그게 무슨 커다란 의미가 있겠는가,
‘모세의 생애’속 무성한 나무를 보며 그곳 계절도 가을이 아닌가.
가을이 왔다. (교계신문 연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