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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Oct 02. 2021

Nearing home

ㅡ존 앳킨슨 그림쇼John Atkinson Grimshaw

 

   

 이상도 하지,

아직도 보름달을 바라볼 때면 달 속의 살짝 어두운 형상에서 토끼를 찾는다.

달에 토끼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뇌는 그렇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반응한다.

이 사소한 사실은 경험이 혹은 스토리가 얼마나 깊게 사람에게 자리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토끼가 방아 찧는 이야기는 누구에게서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도 없으며 팩트가 아닌데도

평생 달을 보며 쌀 방아 찧는 토끼를 생각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가본 국립미술관에는 백남준의 ‘달과 토끼’가 있었다.

나무로 깎은 밝은 갈색의 토끼가 텔레비전 속의 보름달을 응시하고 있었다.

 ‘달은 인류 최초의 텔레비전이다’고 말한 놀라운 백남준의 통찰력은

달 속에서 토끼를 데려와서 오히려 보름달을 응시하게 만들고 있다.

상상 속의 이야기를 현존시키며 오히려 우리의 삶을 되묻고 있다. 


 존 앳킨슨 그림쇼는 달빛 화가라는 별호가 있다.

 그는 1836년 영국 리즈(Leeds)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지만, 부모의 반대로 미술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가 그린 그림을 어머니가 찢어 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그는 리즈에 있는 화랑들을 찾아다니며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즐겨 보러 다녔다.

그의 그림 수업이었을 것이다.

1861년 철도회사에 다니며 결혼을 했지만 동시에 회사를 나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과일, 꽃, 새 등을 그린 작품으로 가진 첫 전시회는 성공적이었고 

이후 대저택을 소유할 정도로 부를 이루며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다.

프랑스 화가 티소와 함께 우정을 나누며 화려한 실내장식과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으나 

결국 그는 라파엘전파였다. 

라파엘전파는 라파엘로 전으로 돌아가자는 의도여서 색채와 명암은 선명하고 아름다웠으며

정확성과 사실성은 매우 중요했다.

 살아있는 듯 정교한 세부묘사가 두드러진다. 특히 그림쇼는 밤을 즐겨 그렸다.

그리고 밤에 떠오르는 달과 그 달빛을 작품의 모델로 삼았다. 

아마 그는 누구보다 밤길을 많이 걸은 사람일 것이다. 달빛으로 생기는 그림자를 눈여겨봤을 것이고

오래된 집을 싸안는 달빛이 주는 정한, 

익숙한 골목길에 달빛이 들이차며 빚어지는 형언키 어려운 정감을 품었을 것이고 

자신의 작품 속에 구현해 냈다. 


 존 엣킨슨 그림쇼의 특징을 많이 담고 있는 작품 <Nearing home>이다.

달은 휘영청 떠 있고 구름은 달빛을 받아 더 희게 빛난다. 

달빛이 얼마나 밝던지 세상은 푸르고 눈부시다.

달빛은 안개의 본산일까?

저 은은한 달빛은 투명한 안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허리 굽은 할아버지와 아이가 걷고 있다.

 가까운 곳으로 산책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일 것이다.

멀지 않는 곳에 있는 집에서 등불이 반짝인다. 

아마 저들이 사는 집일 것이다. 

할아버지가 산책하러 가자고 했을까, 아니면 어린 손주가 졸랐을까,

무엇인가에 심통이 난 아이를 데라고 달이나 보러 가자며 손을 잡고 나왔을 것 같기도 하다.

아이는 어쩌면 구름 사이로 떠 있는 환한 달을 처음 봤을지도 모른다.

어린 마음에도 놀라서(아니 어린 마음이라서) 할아버지 저기 저게 뭐여요? 

지팡이를 짚은 노인은 허리를 펴기가 힘들다. 달이란다, 달이야, 환하지,

손녀를 바라보며 할아버지는 대답한다.  

밤의 푸르름과 일렁이는 달빛, 그리고 사람 없는 거리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따뜻한 할아버지의 손길, 

몇 발자국 더 걸었을 때 달은 구름을 벗어나 아이에게 온전한 자태를 드러냈을 것이다. 

달과 토끼를 연상하듯 아마 저 아이는 처음 본 저 달을 기억할 것이다.

현실에서 조금 비껴 서 있는 할아버지와 자그마한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달빛과 어울리는 존재이다.

달빛을 빈 마음으로 응시하게 되면 거의 언제나 형언키 어려운 쓸쓸함과 애잔함이 가슴속에서 솟아난다. <Nearing home>은 쓸쓸하면서도 따뜻하고 서늘하면서도 다정한 달 같은 작품이다.

추석날 밤 한 시간 넘게 걸으며 달을 찾았지만 달은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문득 들려옵니다> 섬진강 시인의 시가 생각났고 달빛 때문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소동파가 기억났다.

그는 친구를 찾아 훠이훠이 달빛 아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역시 잠들지 않았던 친구 장회민과 함께 뜨락을 거닌다.

대나무와 잣나무의 그림자가 엇갈려 보여 마치 물속처럼 보이던 뜨락이었다.

토끼와 함께 달은 구름 속 어딘가에서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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