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촌 김학수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걱정 근심 없고 정말 즐거워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어요/1981년 가을 혜촌 삼가 그림
그림을 보는 순간 감나무도 아름답지만 아주 아주 어렸을 때 부른 찬송가 가사에 갑자기 마음이 저렸다.
정말 나는 예수께로 가면 기쁜가, 걱정 근심 없이 즐거운가,
예수님 앞에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일 뿐인데
코로나라는 전무후무한 시절을 지나며 건강이나 현실만을 생각하노라 마음이 너무 갈하지 않은가,
시가 쓰여 있으니 시화다.
우리나라 정취가 물씬 풍기는 풍속화다.
붉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가득 열려있는 풍성한 가을이다.
국화는 노랗게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마치 어린이들을 품듯이 뒤편에 자리한 시누대도 싱싱하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들과 두건을 쓴 아이, 두루마기를 입은 큰 소년과 머리를 길게 땋고 어린 동생을 업은 소녀도 있다.
감나무 꼭대기보다 더 아래로 내려와 있는 맑은 구름이 눈에 띈다.
마치 그림 속 아이들보다 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커다란 바위도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 같다.
혜촌 김학수 장로의 작품이다.
혜촌이란 호는 김학수 장로를 한눈에 보여준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혜)와 촌에 사는 사람처럼 자연으로 돌아가 열심히 이 나라의 산천을 그리라는 의지를 담은 村이다.
김학수는 평양 출신으로 남산현감리교회에서 영아세례를 받았다.
미술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던 그는 1937년 ‘묵난 작품으로 일본 동경 남화회전’에 당선되었고
1942년 이당 김은호(金慇鎬) 화백의 문하생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
선전(鮮展)을 비롯해서 각종 대회에서 입선했다.
그는 미술계에서도 인정받아 1966년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를 창립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이때 신세계화랑에서 ‘한국풍속화’ 전시회를 가졌다.
미국 5개 도시에서 순회 전람회를 했으며 1979년 뉴욕에 있는 한인들을 중심으로 뉴욕한국화랑에서 초대전을 갖기도 하였다.
그의 성화는 교계신문의 성탄절과 부활절 특집호, 교계잡지의 표지화로 많이 등장하면서 더욱 알려지기 시작했다.
혜촌의 주요 작품들을 보면 풍속화로는 ‘시장도(市場圖)’, ‘능행도(陵幸圖)’가 있고
역사화로 ‘한양도(漢陽圖)’와 ‘경복궁도(景福宮圖)’가 있다.
90년에는 세종대왕 일대기화 14점을 완성했으며 순수 창작 그림들로 산수화, 화조화, 문인화도 많다.
1939년에 이정란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6·25전쟁이 나자
머지않아 수복한다는 말만 믿고 가족을 남겨두고 월남을 했다.
가족과의 이별을 가슴에 묻은 채 아흔 살에 소천하기까지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결혼을 권유하는 사람들에게 늙고 병들면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겠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피난민들이 중심이 되어 부산시온교회(시온중앙감리교회)를 창립했고
서울이 수복되자 동대문에 서울시온교회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으며,
1967년 서울시온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북에 두고 온 부인과 자녀들(2남2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영감이 떠올랐고 붓이 가는 데로 성화(聖畵)를 그렸다고 고백했다.
그는 풍속 화가로서의 삶을 종교적 소명의식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김학수는 살고 있는 집의 당호를 삼락당으로 지었는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즐거움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사는 것,
그리고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가족과의 생이별을 평생 마음속에 품고 살아왔지만
실제 그의 집에는 자손이 많은 집처럼 자녀와 손자 손녀들의 사진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자녀 대신 어려운 학생들을 도왔고 그들의 결혼사진과 그 자녀들의 사진이었다.
자식 대신 돌보았던 사람이 30여 명이었고
그들은 혜촌회를 만들어 모임을 이어오고 있는데 혜촌의 생일에 모인 사람이 65명에 다다랐다고 하니
성화를 그리는 화가다운 삶을 살아간 것이다.
경기도 용인시 추계리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입구에 김학수의 초대형 성화가 자리하고 있다.
병인박해 시 토마스 선교사가 관헌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장면을 화폭에 담은 것으로 저절로 손을 모으게 하는 작품이다.
쓸쓸하지만 온유한 구도자의 삶답게
그의 작품은 먹의 덧발림을 지양하고 농담만으로 과장 없는 담담한 채색을 즐겼다.
역사풍속화가 빠지기 쉬운 기록성을 탈피하려 창의적인 예술성을 추구했으며 나름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한국적인 성화는 예수 주변의 인물과 배경을 모두 우리 한국의 것으로 하였는데
오직 예수만 유대인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 그렸다.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도 아이들은 모두 한복을 입었으나 예수님은 유대인 복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부드러운 채색으로 예수님을 그린 어느 그림보다 과함 없이 자연스럽다. 삼가그림을 보며 삼가를 생각한다. (교계신문 연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