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니시 타츠야
에드워드 사이드는 ’말년의 양식‘이란 책에서 예술가들의 말년을 깊게 들여다봅니다.
치열하게 살아온 그들이 성취에 의한 안정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풀리지 않는 모순과 씨름하며 또 다른 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사이드는 이를 자발적 망명이라고 불렀는데 그 지점을 기록하기 위한 책이었어요.
가장 원숙해진 청년 정신이라고나 할까요.
눈 속의 매화 구경을 하지 못하고 겨울을 나는 것은 헛산 것이라는 옛글을 쓴 사람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호사 이야기가 아니라 꽃피고 지는 속에 섭리가 있고 탐욕으로 시간을 채우지 말라는 사인인 거죠.
다시 聖誕時가 되었습니다.
여기가 어딘가, 주변을 둘러보며, 잘 살아온 건가,
내 발자국을 뒤돌아보게 되는 시간,
마지막이라서 두렵게 앞을 내다보게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매해 그러면서도 그렇다고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습니다.
작년에도 이 무렵 망연히 주춤거리다가 떠밀려서 혹은 어찌할 수 없어서 발자국을 내밀었는데
그 더딘 발자국으로 벌써 한해를 밟아왔으니 말입니다.
혹시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청년 정신이거나
눈 속의 매화를 찾아 서성이는 걸음이 아닐까,
쓸쓸해서 나를 다독이듯이 생각해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늑대 아저씨!>는 그림 동화책입니다.
아 그림책을 아이들 책이라고 얕보시면 첫인상만으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참람한 오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림책을 글만 읽어서는 책을 반만 보게 됩니다.
그림과 함께 읽어줄 때 제대로 된 독서를 하게 되는 거죠.
그림책은 숨은그림찾기와도 비슷합니다.
한 장의 그림 속에 무수히 많은 뜻이 숨어있어요.
머리를 창의적으로 만들어줄 뿐 아니라 눈을 밝게 해줍니다.
짧아서 시적이며 아름다움은 필수이죠.
감동은 그득하고 가끔 눈물도 흐르게 됩니다.
어느 땐 멋진 비행기가 되어서 잘하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상을 경험하게 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늑대 아저씨!>의 작가 미야니시 타츠야는
일본대학 예술학부를 졸업했고 일본 그림책 상을 받은 작가입니다.
인형미술가, 그래픽 디자이너를 거쳐 그림책 작가가 되었습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즐겨 읽는 동화작가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그의 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제겐 크리스마스만 되면 이 책이 꼭 생각납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
트리를 만드는 아기돼지 열두 마리의 저 즐거운 모습이라니요.
부르고 있는 노래처럼 그들은 지금 두근두근 설렘설렘 랄랄라하고 있습니다.
아기돼지들에게 성탄절은 아주 행복한 날이죠.
파란 지붕을 지닌 집은 따뜻하고 맑아 보입니다.
창문을 눈이라고 보는 시인이 있듯이 안에서도 밖에서도 행복해 보이는 집입니다.
굵고 반듯한 나무들은 아기 돼지들을 사랑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보는 아기 돼지들의 부모 같기도 합니다.
바람을 막아주고 거친 세상에서 아가들을 숨겨주고 싶은 어른들의 마음 같기도 해요.
흰 눈이 펑펑 내리는데도 초록 풀밭들이 여기저기 솟아나 있어요.
마치 아이들 꿈처럼 말이죠.
친구에게 어깨를 내주고 어깨를 딛고 올라서서 리스를 거는 아기돼지,
즐거워하는 저들의 표정이 바로 성탄이네요.
그러나, 그런데, 저기 저 왼쪽 앞 나무를 자세히 보세요.
아무도 모르게 나무 뒤에 늑대 한 마리가 숨어있어요.
이 작은 숲속 역시 세상인 거예요.
혹은 좁혀서 우리 마음이라는 공간으로 환치시켜도 될 것 같네요.
늑대는 무엇일까? 누구일까? 질문하기 시작하면 무한 확장되겠지요.
갑자기 다가오는 우리네 인생의 질고처럼
성탄 트리를 만드는 아기 돼지들의 시간은 스톱 되고 늑대는 눈밭에 넘어집니다.
착한 아기돼지들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망치고 자신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늑대를 치료해주고 붕대를 감아 줍니다.
팔다리 꼬리, 아 입까지요.
늑대는 ‘너희들을 잡아먹고야 말 테다!‘ 소리치지만 붕대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자기식으로만 해석해요.
아픈가 봐...사과하나 봐...고맙다고 인사하나 봐. 봐봐봐 하니
더욱 분한 늑대는 눈물을 흘리는데
아 무지무지 아픈가봐 ...조금만 참으세요 늑대 아저씨..
소통의 부재가 이루어낸 유머러스한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그날 밤 아기돼지들은 아픈 늑대 아저씨에게 빨간 장갑으로 성탄 선물을 해요.
한 개였던 트리는 세상에, 열두 개가 되었어요.
밤새 내 늑대는 트리를 만들고 리스를 걸었죠.
아기돼지들은 신이 나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이전보다 더 신난 크리스마스가 된 거죠.
빨간 장갑을 낀 늑대는 숲을 떠나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려요.
메리 크리스마스!!!
슬프게도 이제 어른이 되어서
축복받은 한 번의 성탄으로 늑대가 착하게 변화되었을 거로 생각할 수는 없어요.
아마 이 숲을 벗어나면 금방 또 본성대로 살 거예요.
그래도 트리를 만드는 순간만큼은 늑대에겐 분명 메리 크리스마스였겠지요.
그리고 다행히 매해 성탄절은 돌아오니까, 그래서 아기돼지들과의 성탄을 기억할 테니까,
아, 그런데,
혹시 우리도 늑대 같아서 해가 저물 무렵 이렇게 성탄절이 다가오는 걸까요.
늑대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는 것일까요.
늑대처럼 진심을 담아
메리 크리스마스!.
(교계신문 연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