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의 론다니니 피에타
엠마누엘라 임부치가 연출한 미켈란젤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다큐라기 보다는 친절한 도슨트 무비라고해야 할까,
실제 이 다큐멘터리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예술품 전시장인
스포르체스코성ㅡ 론다니니의 피에타가 있다 ㅡ에서 개봉되었다고 한다.
연극적인 느낌이 강했다.
물과 대리석이 있는 장면은 무대 장치처럼 여겨진다.
가끔 그 물에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비치고 화면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아주 샅샅이 더듬는다.
실제로 본다 해도 저리 잘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역사적 사건은 재연되고 해설과 미켈란 젤로의 독백은 그의 생각과 삶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만지던 론다니니의 피에타도 아주 자세히 보여진다.
수년 전 서유럽 여행을 할 때, 가이드가 그랬다.
나이 들어서 오는 서유럽 패키지여행은 고려장이라고,
고려장과는 상관없는 나이라 즐거운 농담처럼 웃어넘기긴 했지만, 힘이 들긴 했다.
밤늦게 호텔에 도착에 잠이 들었나 하면 이른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들고 다시 버스를 타야 했다.
지금은 드라이브나 차창 투어를 즐기지만,
그때만 해도 버스 타러 유럽엘 왔나, 불만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도 로마의 바티칸 성당에 들어섰을 때
입장권을 사기 위해 길게 서 있는 줄을 보며 패키지여행의 미덕을 실감하기도 했었다.
줄 없이 바로 입장할 수 있었으니까,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각이 아마 한 시간 반 정도,
시스티나 경당에 입장할 때부터 한참 동안 숨이 막힐 정도로 경이로움에 빠졌다.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아래서 목이 아픈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았다.
프레스코화는 아주 빨리 그려야 한다.
교정도 할 수 없다.
더군다나 천정이다.
예배를 드리는 성당의 천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기에
예배 시간도 피해야 했었다.
천부적 재능이 가득한 그에게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성령이 임하신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사람이 이런 작품을.....
미켈란젤로를 천재 작가로 인식시켰던 24살 나이에 조각한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pieta.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를 형상화한 기독교 미술의 작품 유형이다.
이 말의 뜻은 ‘슬픔’, ‘비탄’이지만 우리말로 표현해보자면 참척이 아닐까,
자식의 죽음을 보는 일보다 더 큰 슬픔이 어디 또 있을까,
그래서 중세 작가들은 피에타를 영감의 근원으로 삼았다.
슬픔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가장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주제였을 것이다.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는 대리석 조각으로 정교하며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마리아가 너무 젊고 아름다워서 후세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했으나
영적인 상태의 아름다움으로 이해되었다.
두 무릎과 한쪽 팔만으로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을 편안히 받쳐 안고 있는데
그 자세들이 지극히 안정적이다. 기이한 것은 마리아의 표정이다.
비탄속에 빠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평온하다.
어쩌면 미켈란젤로는 젊음이 지닌 순수함으로
사람의 삶 속에 나타나는 소소한 슬픔 같은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슬픔보다 깊은 승화된 믿음의 고요한 상태를 응시했다고나 할까,
미켈란젤로는 평생 화가보다는 조각가로 불리길 원했다.
자신의 작업을 대리석 속에 있는 작품들을 발견하는 거라는 그의 말은
매우 예술적인 언어이면서도 도구로 사용되는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론다니니 피에타는 죽기 사흘 전까지 그가 만졌던 작품이다.
론다니니란 이름은 그 집안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누구를 위한 작품이나 부탁을 받고 만든 것이 아니라 순전히 미켈란젤로 자신을 위한 작품이다.
론다니니 피에타는 일반적인 도상의 피에타와 전혀 다른 기이한 형상이다.
혹자는 이 세로의 가느다란 피에타상이 수 세기 후의 추상을 나타낸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수직적인 구도에서 예수의 다리는 꺽여 있다.
24살의 피에타가 신에 대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거라면
죽기 전의 작품 론다나니의 피에타는 인간의 고통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다리 꺽인 예수는 어머니를 등에 업은 듯 보인다.
슬픔에 어찌할 바 모르는 어머니를 업어주며 위로하는 형국일까,
어머니가 아들을 품에 안은 것처럼도 보인다.
살짝 돌려진 예수의 시선은 그런 어머니의 손을 바라보고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자세는 논리와 중력을 무시한 어떤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둘이면서 하나처럼 보이는 장면은 생명과 주검의 측면을 보여주는 것일까,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가 아름다움과 완벽을 추구했다면
론다니니 피에타는 그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듯 놓아버린 형국이다.
마치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를 만들지 않았다는 듯,
아름다움을 놓아버리고 균형과 절제도 서슴없이 버린 채
현대 예술처럼 열린 결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론다니니 피에타를 미완성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논피니토, 미완, 즉 의도적인 미완, 의도적인 생략, 미완 자체를 완성으로 여기기도 한다.
실제 미켈란젤로는 대상의 완성을 형상이 아닌 진리에서 비롯된다고 여겼으니....
바돌로매는 성경의 요한복음 1장에서 언급된 나다나엘과 동일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전승에 의하면 바돌로매ㅡ나다나엘은
이스라엘을 떠나 소아시아인 브리기아, 페르샤, 아르메니아와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인도의 칼얀(Kalyan) 지방에서 선교 중에
산채로 피부가 벗겨지고 죽임을 당하는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세시대 종교화에서 바돌로매 나다나엘은 칼과 몸의 껍질을 들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도 예수님 아래 손에 단도를 쥐고
다른 손에는 자신의 피부 껍질을 들고 있는 나다나엘이 그려져 있다.
그 껍질에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죽음이라는 항구에 도달했다(략) 그 어떤 그림도 조각도 나를 만족시킬 수 없다(략)
나의 영혼은 그저 십자가 위에 팔을 벌린 그 사랑을 향해 갈 것이다>
미켈란 젤로가 노년에 쓴 시이다.
여전히 우리에게 최고의 천재인 미켈란젤로도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은
들에 핀 백합화를 연상하게 한다.
다시 새해가 되었다.
그 어떤 사람도 따르지 못할만한 커다란 성취를 이룬 미켈란젤로의 영혼처럼
그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해가 될 수 있기를 .......
(교계신문 연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