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영 Jan 20. 2022

기억의 지속

살바도르 달리


전시회에 가서 도록 사는 버릇을 버렸다. 

도록은 그림이 주인공이라 다른 책들보다 사이즈도 훨씬 크고 무겁다.

 늙으면 글 대신 그림이라도 봐야지, 생각하며 모으기 시작했으나 양이 많아지니 점차 부담스럽다. 

잘하는 것 하나가 어느 순간 멈추기다. 

소소한 상태에서 끝내기를 잘한다. 

사진을 찍기 시작하고 카메라를 서너 번 바꾸다가 다시 렌즈 욕심이 생길 무렵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작가가 될 것도 아니고 여기서 멈춰. 

가벼운 핸드폰 사진이 어찌 무거운 사진기와 비교할 수 있을까만 

만족하지 못하면 또 어때, 남들이 잘 찍은 사진을 보는 거지. 

책도 줄기차게 사서 읽다가 갑자기 많은 책이 지겨워졌다. 

버리고 또 버리고, 

지금은 고양시 도서관이 내 책장이다. 

어마어마한 책장을 소유하고 있는 차경의 달인. 

그런데도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초현실주의 거장들. 

로테르담 보이만스 판뵈닝언 박물관 걸작들의 전시회의 도록을 샀다. 39000원. 

전시도 마음에 들고 작품 몇몇은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작품을 실제 본다는 것은 패키지여행과 같다. 

발자국 찍고 겉만 보는 여행일지라도 발걸음이 주는 느낌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진본을 알현했으니 사진 속 그림을 보아도 원화의 느낌이 오롯이 살아난다. 

그 기쁨을 안다. 


DDP에서도 살바도르 달리의 전시회가 있었다. 

전시회를  가다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코믹함이랄지 괴짜 근성 혹은 시대를 앞서가는 사조를 끌어내는 발상의 전환은

 기본기가 없는 사람한테서 절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가령 <샘>으로 유명한 뒤샹의 전시회에서도

 그가 얼마나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놀라운 화가인지를 충분히 엿볼 수 있었는데

 살바도르 달리 역시 천재였다. 

달리가 17세에 그린 자화상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이었다.

 그런 놀라운 작품들 앞에서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 때문이다. 

사실은 작품을 보는 동안 내내 힘들었다. 

세계의 유명한 미술관에서 수집해온 작품들이고 

생전에 다시 보기 어려운 작품들이니 좀 더 넓고 쾌적한 상태에서 관람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가람 미술관은 DDP보다는 좀 나았다.

 챕터마다 마치 초현실주의 얼굴마담이라도 되듯이 살바도르 달리가 나타나곤 했는데 

집중할 수 있어선지 작품들이 마음속으로 수욱숙 스며 들었다. 

불행히도 두 전시회에서 달리의 아이콘 <기억의 지속>을 만날 수 없어서 무척 아쉬웠다.

 크기는 생각보다 적은 24.1x33cm.

 이 그림을 처음 교과서에서 봤는데 땅 위에 있는 이상한 형체는 코끼리인가? 

시계를 천에다 그렸나? 만화 같네.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기억의 지속>은 달리의 27세때 작품이다. 

그는 어느 날 심한 두통 때문에 극장을 가지 못하고 혼자 앉아 있을 때

시계가 흔들거리는 것을 실제로 보았다고 한다.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녹아내리는 치즈를 보며 시계를 생각하기도 했다는데 

단순하게 본다면 물질인 시계 속에서 본질을,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본 게 아닐까,

 치즈가 녹아내리듯이 시간이 녹아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시간은 같은 것이 아니라 그 밀도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간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논리에 대한 표현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달리는 실제 딱딱한 형상들을 부드럽게 그리는 것에 집착하기도 했다고,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나 숨어있는 의미를 헤아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세히 보면 회중시계로 보이는 시계 위에 개미들이 가득하다. 

죽은 박쥐 위를 기어 다니던 개미 떼를 본 달리는 “시간을 먹는 위대한 존재”라 는 생각을 하면서도 

죽음과 부패를 지니고 있는 개미가 무서워 개미핥기를 키웠다고 한다. 

달리의 시계는 결국 제목과는 달리

시간 속에서 소멸하는 역사나 우주 혹은 물질과 존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코끼린가 했던 기이한 형상은 시계에 눌려있다.

 길다란 속눈썹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설핏 여인이 누워있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혹자는 달리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달리의 고향인 카탈루냐의 그레우스만. 

호수라고 해도 될 만큼 고요하고 침묵에 잠겨 있다. 

상자 위로 솟아있는 죽은 나뭇가지는

마치 손을 길게 펼친 채 바다위 절벽에게 느릿한 시간을 나눠줄 것 같기도 하다. 

상자 위 시계도 ‘자 가져가세요. 당신의 시간을’

 꿈꾸는 자의 시간도 말하는 것 같다. ‘당신의 기억, 기억을 지속하시라니까요’

살바도르 달리는 관종이었다. 

마지막 입원했을 때도 그는 자신의 입원 소식을 방송에서 듣기를 원했다고 한다. 

자기애가 깊으면서도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했던 로맨티시스트, 

수염을 가지고 다니며 수염 하실래요? 물었던 기인, 

“모든 교회의 종들은 울릴지어다 보라 살바도르 달리가 태어났도다” 

세상을 향해 말하던 사람, 

그는 자신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광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이한 행적만큼 기이한 이야기들도 많다. 

그중의 하나가 밀레의 <만종>에 얽힌 이야기. 

달리는 <만종>에 경도되었고 책까지 집필한다. 

기도하는 그 평안한 모습에서 강렬한 죽음의 기운을 예감했다고, 

실제 책이 발간된 이십 년 후 엑스레이 촬영을 통해 밝혀진 것은

부부 사이에 아이의 관이 있었을 거라는 것, 


우디 앨런이 감독한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달리가 나온다. 

현재에서 과거로 간 주인공 남자가 다른 시대의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하자 

초현실주의자들이었던 달리의 친구들은

 흠, 사진이 보이네, 영화가 보이는데? 달리는 코뿔소가 보여! 말한다. 

달리는 코뿔소에 관심이 많았다.

 폭소가 나오는 대목이다. 

달리는 1920년대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상징이었다.

 수많은 상업적인 디자인,

 지금도 우리에게 친근한 츄파춥스뿐 아니라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달리가 그린 ‘전쟁의 얼굴’은 요즈음 핫한 중국 작가 위민준의 얼굴에서도 보인다. 

그가 창조한 세계는 현재를 사는 예술가들에게 여전히 영감의 원천이다. 

초현실에서나 가능한 장면을 그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으로 섬세하게 그려냈다. 

<기억의 지속>은 먼 미래에도 여전히, 

어쩌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매력적인 작품이 되어 갈 것이다. (교계신문 연재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