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네
<시인>이란 참 특이한 칭어다. 단순하게 보면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렇다고 소설 쓰는 사람을 소설인, 희곡 쓰는 사람을 희곡인 이라고 하지 않는다.
음악이라는 사람을 음인으로 부르지 않으며 그림 그리는 사람을 화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특별히 시를 쓰는 사람에게만 시인이란 칭호가 주어진다.
살짝 생각을 달리 해보면 시는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어서 시를 쓰는 사람은 시인이 되는가,
로맨틱하거나 평범하지 않은 상황을 연출하는 사람에게
오, 시인인데, 시적인데, 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니까,
혹시 무한대로 열려있는 장르일 수도 있겠다.
시를 나타내는 poesia는 시적인, 시적 상상 시정등 다양한 상황을 내포하고 있다.
회화에서 포에지아는 그려진 시(painted poem)라는 뜻으로 시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 작품이나
정서적으로 풍성한 감흥을 주는 그림을 칭한다.
특히 인물이 있는 풍경화의 형식을 취한 작품을 일컫는다.
포에지아 회화의 등장은 1500년 초,
그 시대의 거의 모든 회화가 종교성을 주제로 한 스토리가 선명한 작품들이 주류였는데
플롯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작품들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전원의 풍경과 사람들, 뜻을 알 수 없는 상황들을 보며 사람마다 분분한 해석을 낳게 하는,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작품의 의도를 궁금해하며 연구자들은 각자의 해석과 결론을 내놓는다.
어쩌면 그 시절의 포에지아는 독자적이며 자유롭고 단순한 해석을 경계하는 현대미술을 이미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베네치아는 유럽 출판계의 중심지로 책 한 권을 삼천 권씩 찍어낼 수 있는 출판사가 200곳이 넘었다고 한다.
그 시절 베네치아에서는 전원 문학이 움트고 있었다.
현실을 탈피하고자(세상에 그 시절에도 현실 탈피를 꿈꾸었다니...)
이상향인 아르카디아ㅡ유토피아보다는 도화원기처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사는 삶ㅡ를 꿈꾸는 문학이 등장했다.
전원 문학의 가장 유명한 책인 산나자로의 ‘아르카디아’는 별다른 스토리가 없으며
무엇보다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즉 사람과 서사보다는 풍경의 묘사가 중심이었다.
포에지아 역시 이런 전원 문학에 기대어 인물과 서사가 중심이었던 화풍에서 벗어나
배경으로 존재했던 풍경이 전면에 나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조르조네는 포에지아 최초의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 ‘폭풍ㅡ그 시절 그릴 수 없는 것으로 여겼던 번개를 그린 그림’, ‘세 철학자’
그리고 ‘시인에 대한 경의’를 포에지아의 결정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설왕설래, 읽는 자에 따라 무수한 해석이 이어져 오고 있다.
<시인에 대한 경의>는 오른쪽 하반부에 네 사람이 등장해있지만, 압도적인 풍경화다.
거대한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나무들, 먼 곳의 궁전보다 더 우람하게 자란 무성한 식물들,
목가적인 풍경의 방점처럼 사슴 가족들은 평화롭게 노닐고 있으며
표범은 꼬리를 내린 온순한 모습으로 풀을 더듬고 있다.
기독교 도상학적으로 공작의 고기는 부패하지 않으며 활짝 펼쳐진 아름다운 꼬리는 별이 가득한 하늘을 나타내주어 영원을 의미한다.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하며 저세상으로 인도하는 길잡이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이런 풍경 속에 있는 저 사람들은 누구인가.
혹자는 신화를 그렸을 것이다. 그래서 제우스의 아들일 거라고 했고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기록되어있는 인물이다고 추론한 연구자도 있다.
플루투스 신화를 가져온 사람도 있으며 사투르누스로,
혹은 예술가의 경험에 따른 우울함의 알레고리를 비유했을 거라는 설도 있다.
분절된 모티브들이 화면을 구성하고 있어 단언할 수 없는 모호함의 매력이 가득한 작품.
그러나 대다수 사람은 옥좌에 앉은 이가 다윗이나 솔로몬이며 어린아이에게 신앙을 교육하고 있는 장면일 거로 생각했다.
그는 화려한 황금색 옷을 입고 머리에 월계관을 썼으며 사치스러운 캐노피가 그의 영화를 나타내주고 있다.
그런데도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떤가, 허망하고 슬픔에 차 있다.
옥좌도 캐노피도 화려한 옷도 어쩌면 그에게 지극한 경의로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도
어쩌면 사랑스러운 아이조차 그의 안중에는 없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는 눈빛이다.
저 무성하고 생기 움트는 자연은 인간이 얼마나 짧은 시간에 오고 가는 존재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사람의 이성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는 학자들이 쓴 화려하게 장정된 책들도 발치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16세기의 전기 작가 조르조 바사리가 조조르조네를 화가이자 탁월한 가수, 그리고 류트 연주자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작가의 분신일 수도 있는 류트를 연주하는 사람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요. 내 평생 음악을 해왔지만, 음악 역시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아이는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한 자세로 서서 차마 그를 우러러보지도 못한 채 저는 어떡해야 하죠? 묻고 있는 것일까,
습관적이겠지만 지극한 모습으로 경의를 표하고 있는 사람도 갈 바를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다.
기원전 5-6세기 경 시모니데스가 말했다.
‘회화는 말 없는 시이며 시는 말하는 회화’라고
‘시인에 대한 경의’는 한 장의 그림이지만 깊은 은유를 지닌 시처럼 무수한 결을 지닌 채 우리에게 다가온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세상 모든 것을 경험해보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허무뿐,
그래서 나는 저 옥좌에 앉아있는 사람을 솔로몬으로 여긴다.
봄이 지척이다.
죽은 것처럼 보이던 산야에 풀은 솟아나고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며 나무는 푸르러질 것이다.
영생이 없다면 자연의 순환조차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교계신문 연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