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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l 16. 2021

D에게 보내는 편지

앙드레 고르




염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시작이지만, 기다려도, 기다리지 않아도 여름의 끝 역시 금방 올 것입니다.

언제나 끝이 새로운 시작과 함께 한다는 그 당연한 것을 소스라치게 생각할 때가 많아집니다.

세월 속에서 전체를 보는 눈이 살짝 떠진 탓일겝니다.



‘D에게 보내는 편지’를 서가에서 꺼내 읽습니다.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행간이 주는 느낌이 쉽질 않아 자주 멈춥니다.

북한산 숨은 벽 오를 때처럼 천천히 그리고 가끔 깊게 숨을 쉬어주어야 하는 책이지요.

사진이 두 장 실려 있는데 

젊을 때의 작가 앙드레고르와 디로 불리우는 여자 도린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사진입니다.

곱슬머리의 마른 듯한 남자의 매부리코는 그가 유대인임을 나타내주고 있으면서

약간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내성적인 성품을 엿보이게 합니다.

영국 여인 도린은 활짝 웃는 얼굴로 고르를 바라봅니다.

무엇이든 다가오는 것들을 확실하게 직시하겠다는 당당함이 보입니다.



그리고 책 끝에 바짝 여윈 노부부의 사진이 있습니다.

여전히 고르의 시선은 약간 아래를 향하고 있고,

도린은 예전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을 감고 고르의 품에 안겨있는 사진입니다. 

고르가 이 글을 쓴 것은 2006년 3월21일부터 6월 6일까지였어요.

결혼한 지 49년 되는 해,

두 사람이 죽은 것은 9월 22일. 

마지막 이십여 년은 불치병에 걸린 도린을 간호한 세월이었어요.

고르는 도린이 아프자 많은 사회적 일들을 다 접고 도린과 함께 했습니다.

사랑이 감성이나 감정이 아닌 어깨에 진 책임이란 것을 안겁니다.

그는 미래에 투자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지혜라는 것을,

지혜 속에 사람이 움터 난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미래도 과거도 아닌 현재를 사는 것,

물론 우리 모두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 우리의 시선은 과거에 머물거나 미래만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염하 가운데서 그대의 안부를 묻습니다.

그대는 지금 현재를 살고 있나요?

무참한 더위 속에서 가끔 소나기가 강하게 내립니다.

시야를 가리며 세상을 샤워해주는 굵은 빗줄기,

아름답습니다.

지금 내 앞의 소나기는 삶의 마술이자 예술이며 에너지입니다.

오란비와 소나기가 품고 있는 여름ㅡ 

풀과 나무는 맹성해지고 벼는 더 짙은 푸르름으로 존재를 완성하고 있습니다.

열매들은 공간 속에 자신의 자리를 넓혀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름은 열매를 바라보면서 내 열매를 생각해볼 시간이기도 합니다.

열매가 자신을 넓히고 있는 이유는 자신을 위함이 아닙니다.

잘 자라나서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주기 위한 완벽한 이타의 행위입니다.

내 열매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열매가 자신의 몸으로 나에게 말합니다.

여름은 그래서 연약한 자는 손을 모으고 근원을 생각해야 하고 

강한 자는 무릎을 꿇고 겸손해야 할 시간이기도 합니다.



도린이 암인 것을 알고.....

고르는 하루 종일 정원의 땅을 팝니다.

도린은 창가에 서서 꼼짝도 안 하고 먼 곳만 바라봅니다.

고르는 그 순간의 도린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두려움 없이 죽음과 맞서기 위해 죽음을 길들이고 있는 시간>

고르가 생각하는 도린이 그 한 귀절에 다 나와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고르를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했다는군요.

그런데 고르는 언제나 모든 글이나 결정에서 도린이라는 필터를 사용했다는 고백을 합니다.

여든두 살 아픈 아내에 대한 사랑 고백을 적은 글이 바로 이‘D에게 보내는 편지’ 입니다.

아내에 대한 사랑 고백만이 아닙니다.

그 사랑 속에는 아내에 대한, 사람에 대한, 존재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고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며 정리하기도 하고 

자신의 저서랄지, 사회 상황, 자신의 철학에 대한 점검도 이루어집니다.

글이라는, 편지라는 고백을 통해 아내에 대한 사랑을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이라고 하여 왜 허접한 일상이 없었겠습니까?

우리네 삶처럼 소소한 다툼과 서운함으로 인해 감정이 상하기도 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소소한것들을 이겨냈습니다.

가야할 곳의 방향을 정확이 알았던 거지요.

사랑한다는 것,

자신들의 현재가 과거이면서 미래라는 것,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잘사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습니다.

우리모두 슈바이처나 간디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 원대한 이야기는 이젠 잊기로 해요.(내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입니다. 이젠 잊기로 해요ㅎㅎ)


화분을 좀 키우고 있는데,

화분도 사실은 공간의 미학이 필요해서,

넓은 집에 선이 멋진 커다란 식물 몇 개가 아름답긴 하지만 모두 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있는 화분으로 만족하며 이제 더 이상 화분을 사지 않겠다 결심했습니다.

이미 집안에 있는 살림들도 줄일만큼 줄이고 거의 사지 않습니다.

책도 이제 잘 사지 않습니다.

도서관이 나의 서가가 되어서 최근 들어서 서가를 다섯 개나 버렸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훤한 벽면이 놀랍기도 하고 서운키도 하지만

서운한 감정을 즐기자. 결심했더니 차츰 괜찮아 지더군요.



잘자란 고무나무 순을 가지 치기 합니다.

그리고 그 순을 물에 담굽니다.

이렇게 습도가 높고 더운날이면 금방 하얀 순이 가지에 생깁니다. 그리고 자라나는 뿌리.....



식물도 키워보니 <자람>에 매력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변화, 촉, 그리고 새순들.....

돌연 변이로 생긴 기이한 빛깔, 흔하지 않는 색들,

그리고 비쌈도 매력이 되겠지요.

그러나 나는 작은 변화인 <식물의 자람>을 응시하겠습니다.

오래 산 아내, 아픈 아내에게서 끊임없이 사랑을 발견하고 응시하는 고르처럼 말이지요.

외출하고 돌아와서 끈적이는 몸을 씻어주는 물이 있어서

이 여름 얼마나 행복한지요.

그대의 안부를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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