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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ug 24. 2021

분꽃頌

처서즈음에

꼭 지적 인연이라는 것이 발텨 벤야민을 만난다거나 

롤랑바르트와의 조우에 의해서만 되어지는 일은 아니지 싶습니다.

요즈음 분꽃 말이지요. 

이 여리면서도 환한 친구

어쩌면 가로등보다 더 일찍 켜져서 주변을 밝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지런하고 근면해 보이는 성실한 벗입니다. 

여름 끝자락 꽃이니 여름꽃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분처럼.... 분향기처럼.....

아주 살짝 가을 느낌 묻어납니다.    

서늘한 바람자락 몇 올 

낮의 따가운 기운에 섞이면 해저물녘입니다. 

아마도 뜨락의 저 친구는 

그 몇 올이 지닌 서늘한 기운에 몸을 여는 것 같습니다. 

차가운 기운을 좋아하는 거지요.

덥고 뜨거운...그리고 열나는 몸체보다는

이성적이고 차분한 정신으로 한참 기울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요하고 정적인 해저물녘 빛이 노크하면 

배시시 문을 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 노년을 향해서 더듬거리는 발걸음 앞으로 내딛는 나와  

함께 해줄 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낮의 이글거림이 아닌

이제야 삶을 조금 이해할 듯한, 이해하겠네, 그랬었어., 사려 깊은 눈빛을 지닌....

긴 시간을 걸어온 여인의 걸음 같은 

해저물녘의 꽃이니 말이지요. 

분꽃. 지성적이고 우아한 벗입니다.  

이 우아한 벗은 아주 아주 오래 전...아주 어렸을 적에 

내 안에 심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땅도 모르고 씨앗도 모른 채 그렇죠. 세상의 많은 꽃들은 

바람에 날려서 혹은 그냥 저절로 혼자 터져셔 누군가의 정겨운 손길에 의해서.. 

다들 심어졌고 피어나는데 내 안은 무지했거나 너무 동토였거나 하여 이제야 피어나게 된 거지요. 

‘핌’을 ‘바라보는 것’이 ‘핌’일수도 있어요. 

환유적 기표 일수도 있지만요. 


가을, 돌이킬 수 없는 가을로 들어섰어요.

이제 풀은 자라지 않을 거구요. 천지가 쓸쓸해지는 시간을 넘어 벼가 익어가겠지요. 

처서 초후이니 말입니다.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는 처서

뭉게구름 타고 오는 처서...이 더 할 수 없이 로맨틱한 시간에 

책이나 옷만 포쇄할 게 아니라 맘도 열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분꽃은 포쇄별감일지도 모르겠어요. 

처서時라고 분꽃이 제게 하는 이야기여요. 

닫아두었던 빗장을 거기 여세요. 저두 함께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다 우리 ‘초연'해 보이는 분꽃 확실하게 심는 거예요. 

그 꽃 잘 자라기만 한다면 삶이 좀 여유 있어지지 않을까요.

급급한 짜증, 일상의 회오리 욕심과 탐욕. 갈증....에서 

약간만 비켜나도 그게 어디에요. 



박남준 시인에게는 분꽃이 아주 특별하게 다가왔나 봐요.

<이름 부르는 일>로 말이죠.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네/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문밖은 이내 적막강산/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문장을 마음대로 바꿔 읽어봤어요. 섞어두 괜찮고 차례를 바꿔도 괜찮고 

여인이어도 괜찮고 남인이어도 괜찮은 시인의 시 일수도 있고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본향일수도 있는 무한대의 판이네요. 

그 사람 분꽃향내 지닌 사람. 적막강산과 뜨겁고 아픈 가슴을 함께 느끼게 하는 사람.

이전에는 정말 분꽃 같은 여인이었다가 이제는 적막강산인 사람

그런데도 여전히 내 가슴 뜨겁고 아프게 하는 사람...     

시도 변할까요. 시간이 시를 열매처럼 익게 할까요.

더욱 단단해지는 씨앗이 시가 되게 할까요

혹시 시인의 분꽃은 내가 바라본 분꽃이 아니라 시인만의 분꽃일수도 있겠네요.   

   

분꽃은 페루의 놀라움(marvel of Peru)

분꽃이 피면 엄마가 저녁을 할 시간이죠. 

이제

분꽃 하염없이 피어나고 속절없이 져갈 거에요. 

돌이킬 수 없는 가을로 들어섰네요.

아주 성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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