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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ug 25. 2021

가을 감별법


이즈음 누군가 물어 주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가을은 어디쯤부터 어떻게 시작 하는지.........

그에게 나는 나만의 가을 감별법을 친절하게 알려줄 것이다.     

가을은 

시간이 흘러서 다가오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여름의 양이 가득 차서 

슬며시 물러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그보다는

내내 과도한 위엄 부리며 서 있다가 

갑자기 이게 아닌데, 

홀연 무엇인가를 깨닫는 시간,

그래서 갑자기 허리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구름 담벼락에 슬며시 기대서는 즈음,

가을 문 열렸구나 중얼거려도 된다는 것을, 

달라지는 햇살의 허리춤 이야기다. 


어느 날, 

조금 이른 아침 

어둠과 밝음의 따악 중간 즈음 

창문을 열면 습기 말라가는 나뭇잎 향 짙고,

갈 길 바쁜 寒蟬 ㅡ 매미의 소리에 가슴이 저며 오면 

(왜 이른 새벽 들려오는 부지런한 매미소리는 저다지도 구슬픈가) 

그렇게 무념이 잠시 서 있을 때 

단풍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스듬하게 스며들어 오고.

단풍나무 잎의 위와 아래가 선명하게 달라 보인네 싶으면,

말하자면 

모든 존재의 그림자가 습기 걷힌 대기 안에서 선명해지는 때,

그때를 가을의 시작이라고 단언해도 된다.     

설거지를 한 뒤 

손이 혼자 있기를 싫어해서 

괜히 서로 비벼주기를 원하거나 

거기 로션 좀 발라 주지? 

여름 내내 조용하던 손바닥이 중얼거리기 시작하면 

그렇지, 

손바닥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秋聲으로 여겨도 충분하다. 

더불어 그렇다. 어제보다 좀 더, 그제 보다 조금 더, 

보이는 것들 마다 그림자를 달고 있거나 

혹은 선명하게 그림자가 보이면 

누구나 그림자라는 존재에 유념하게 되고, 

마치 그들의 친근한 벗이라도 되듯 

悲나 哀를 떠오르는데, 

나는 그것을 가을의 포획술이라 본다. 

사실 이 둘은 나뭇잎 위 아래처럼 거의 비슷한데

그러면서도  다른 독특한 양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선지

여름에는 잘 보이지 않던 그림자를 가을이면 슬쩍 내보내는 성향에  

혹은 양면성이라고 해도 무리 없는 딱 그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이미 팔월의 나뭇잎들은 극점을 지나서 내리막길로 들어서 있다. 

그러니 나뭇잎 그림자가 짙어짐은 

투명한 가을 햇살의 총애와 대비되는 알수 없는 비애를 품고 있다.  


'우륵'의 비애와도 흡사하다. 

우륵에 대한 글을 읽고 우륵, 우륵, 중얼거려 보았다.  

어전지 그이름이  울먹이는 듯, 슬픔을 속으로 기어이 참아내고 있질 않는가. 

그는 가야국 성열현(省熱縣) 사람인데 

나라가 망한 뒤 자신의 나라를 침범한 진흥왕을 찾아간다. 

가야금을 매고 가서 

진흥왕에게 살려주세요. 당신 발아래 있게 해주세요. 말한다. 

가야금을 매고 원수를 찾아가는 그의 발걸음과 그의 心思를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나를 하마 천 번쯤 만 번쯤 되뇌지 않았을까,

무겁고 무거운 발걸음을 

등에 길다랗게 맨 가야금이 툭툭 밀었을 것이다. 

그래서 겨우 진흥왕 앞에 도달했을 터, 

그는 아마 목숨 때문에 살고 싶었다기보다는 가야금 때문에 살고 싶었을 것이다. 

진흥왕은 우륵을 현재의 충주인 국원(國原)에 머물러 살게 했다.

그리고 주(注知), 계고(階古), 만덕(萬德) 이란 세 젊은이를 보내 가야금을 배우도록 했다. 

우륵은 이 세 명의 젊은이를 받아들여 가야금 11곡을 모두 전수하였는데,

(그 열한 곡을 남기기 위하여 진흥왕을 찾아갔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 젊은 제자들은 11곡을 전수 받은 뒤 번거롭고 음탕하다 하여

왜 아니 그렇겠는가. 

나라를 잃어버린 정처 없는 슬픔 속에서 

끝까지 목숨을 부지하는 자의 굴욕과 한이 배어있는 음악이었으니,

이를 다시 5곡으로 개작을 해버렸다. 

우륵은 처음엔 크게 성을 내었으나 

이들이 연주하는 가야금 5곡을 듣고 난 뒤에는 

매우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즐거우면서도 방탕하지 않고 애련하면서도 슬프지 아니하다 

樂而不流 哀而不悲."

사람들은 추측한다.

우륵은 제자들의 음악에서 새로운 시대의 음악을 느꼈을 거라고,

그래서 그 음악을 받아들였을 거라고, 

과연 그랬을까,  

아마도 그는 살아 있는 목숨 자체가 슬픔이엇을 것이다.  

슬픔이 호흡이 되엇을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슬픔의 결을 알아챌수 있었을 것이다. . 

그가 참기 어려운 굴욕까지 감수하면서 지켜낸 목숨과 같은 음악이 

그가 가르친 제자들에 의해 

마치 부활체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때, 

더군다나 그 음악이 오히려 그가 품어온 음악보다 더 깊고 오묘한 

그가 생각지 못햇던 음악이었을 때, 

애련하면서도 슬프지 아니한, ‘哀而不悲’로 현현되었을 때, 

그는 무엇보다 참 쓸쓸했을 것 같다. 

그래서 슬픔의 결 중에 가장 근원적인 질감을 나타내는 쓸쓸함을 

혹 哀而不悲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친정 아버지 돌아가신 지 오래 되었다. , 

여전히 아버지 생각만 하면 가슴 저린 대목 하나. 

이상하지,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부지불식의 아주 짧은 사건 하나가

어떤 불효보다 더 가슴 아프게 각인되어 있으니, 

무슨 이야긴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거실에서 우리들은 웃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아버지가 아픔에 겨워 누워 계시는데, 

문 하나 사이에 두고 아픈 아버지가 들리게 

엄마랑 우리 형제들이 웃었던 것이다. 

웃다가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얼른 웃음을 그쳤다.

그렇다고 이미 터져 나와 아버지 귀로 들어간 읏음 소리 조차 회수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그 때, 아버지는 얼마나 쓸쓸하셨을까, 

이미 다른 생을 살고 있구나. 나 떠나도 너희들은 그렇게 웃으면서 살겠지. 

아, 몸의 아픔보다 그 쓸쓸함이 더 아프지 않았을까.


딱 이 무렵이다.

가을의 초입,

아픈 아버지를 쓸쓸하게 만든 불효는 시간 흐를수록 더욱 짙어간다. 

아마도 기억이 살아 있는 한 아버지의 쓸쓸함은,아버지를 쓸쓸하게 만들었던 웃음소리는 

쓸쓸해지는 나이와 함께 나와 동행할 것이다.

아버지 계시지 않는 친정집 뜨락에는 

무화과 나무 열매가 익어가고 있을 것이다. 

바로 밑 장독대 아래쪽에서는 수선화 줄기가 물기 말라가며 이별 할 진영을 갖추어가고, 

지붕 위 제암산 쪽 하늘은 날마다 조금씩 누군가 진한 쪽물을 들여오듯 

푸르게 푸르게 변해 가고 있을 것이다.     


(상략)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자국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시인은 모름지기/김남주)    


모름지기 시인만 삶 앞에 다소곳하랴, 다소곳 귀를 기울여야 하랴,

당신의 가을은 어디쯤부터 어떻게 시작 하는지.........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당신의 가을은 어디쯤부터 어떻게 시작 하는지.....

나도 당신의 가을 감별법이 궁금하다고 

나는 당신에게 다소곳이 묻고

당신의 말을 다소곳이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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