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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Sep 07. 2021

고레다 히로카즈의

거의 모든 영화에 대한

*****

원고지 70여장의 글이다. 

에세이 평론이라고 나 혼자 이름을 만들어보았다. 

영화 평론이 꼭 어려운 단어로만 이루어져야 할까, 

얼른 쉬 오지 않는 단어를 사용 그럴듯한 프레임을 만들어야먄 영화 평론일까, 

물론 가끔 전혀 내가 의식하지 못햇던 부분을 그들이 본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쉬운 영화를 어렵게  

가슴 따뜻한  영화를 차갑게 만들 일은 없지 않을까, 

고레다 히로카즈의 영화에 대한 소박한 나의 견해 들이다.                                       



  <들어가며>    



 ‘덧없는 세상의 그림’이라는 뜻의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의 그림이다. 

기녀 광대 미인등 그 시절의 인물들과 함께

당대 사람들의 생활 속습과 풍물 풍경등을 함께 그려낸 일종의 풍속화. 

에도시대 뛰어난 작가이던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후지산을 주제로 한 판화집 ‘후지산 36경(富嶽三十六景)’을 제작했다. 

36경중 하나인 ‘청명한 아침의 시원한 바람’은 

떠오르는 태양으로 인해 빨갛게 변한 후지산이 푸른 하늘보다 더 크고 장대해 보인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시나가와 파도 뒤로 보이는 후지산’의 후지산은 

거대한 파도 뒤에 아주 작은 모습으로 숨어있다. 

호쿠사이는 제목부터 은유를 사용한 것이다.

 엄청나게 큰 후지산을 그려놓고

 후지산이란 제목 대신‘청명한 아침과 시원한 바람’을 붙이고 

바다의 제왕처럼 파도를 표현해놓은 그림 뒤에 

보일락 말락한 후지산을 오히려 제목으로 내세웠다. 

우키요에의 단순하면서도 추상적인 구상, 

대담한 생략과 간결한 표현은

 이제 겨우 정교한 복사를 벗어나 말 그대로

사물의 인상을 스케치하던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에겐 놀라운 충격이었다. 

우키요에를 통해 프랑스 화가들은 사물이나 명암을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고

 주제인 후지산이 중심이 아닌 곳에 있어도 된다는 자유를 깨달았다. 

자포니즘의 시대가 열렸다.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보면 우키요에가 살짝살짝 엿보인다.

 덧없는, 떠다니는, 라는 뜻의 우키요는 세상에 대한 환유로도 해석된다. 

고레다 감독의 첫 작품 <환상의 빛>속에는 부유하는 인생의 한 장면이 선명하게 포집 되어있다. 


 젊은 아내 유미코(에스미마키코분)는 남편이 일하는 곳으로 찾아와 

격자 유리창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바꾸며 

온통 밝음, 온통 환함, 온통 명랑함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한다. 

유미코를 먼저 발견한 동료가 남편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분)에게 알려주고

 이쿠오는 그런 아내를 바라본다. 

가만히 무연히 말없이 사랑하는 아내를 격자창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이쿠오의 눈빛이 아련하다. 

거기에 이미 죽음이 고여있었던 것일까? 

이쿠오가 비가 올 것 같다며 다시 돌아와 우산을 들고 나선다. 

유미코는 그런 남편이 너무 좋아 다시 짧은 거리를 따라가며 배웅을 하고 남편의 등 뒤에서 

온통 밝음 온통 환함 온통 명랑함으로 이쿠오를 바라보고 서 있다.

 이쿠오는 우산을 앞뒤로 흔들며 멀어지고……. 

 그날 밤 유미코는  잠든 아이 옆에서 졸면서 이쿠오를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세차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남편의 죽음 앞에서 유미코는 또 다른 깊은 충격을 받게 된다. 

“그냥 차를 향해 걸어오더래요.” 


‘시나가와 파도 뒤로 보이는 후지산’을 자세히 바라보면 

파도의 위용 앞에서 인간은 파도의 방울보다 더 작게 그려 있다. 

그러나 가느다란 배는 파도를 피해 달아나지 않고 오히려 파도를 향해 전진한다.

 유미코는 시나가와 파도 속에 있다. 

파도를 응시하듯 이쿠오의 죽음을 묻고 또 묻는다.       

 우키요에의 특징은 선명한 필치와 대담한 구도, 그림자의 표현이 없으며

원근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원근법을 깨기도 한다. 

설명되지 않는 생의 비의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일 까, 

고레다 감독 역시 삶에서 다가오는 고통과 절망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주인공들과 함께 답을 찾지만 결국 남는 것은 깊은 침묵과 더 많아진 질문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고통스러운 유미코를

 ‘청명한 아침의 시원한 바람’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 담을 수밖에 없다. 

 에도시대의 우키요에는 평범한 대중문화였다. 

 고레다 히로카즈감독의 영화 역시 대중 속에 자리한다.

 그의 시선은 평균 이하의 경제력을 지닌 사람들이나 어린아이들에게 자주 머문다. 

쉽다는 뜻은 아니다. 

작가 감독답게 그의 복선은 유려하고 섬세한 결로 숨어있어

가끔은 깊은 눈길로 살펴봐야 하고 생각하면서 엮어야 한다.

 점자를 만지듯 해독해야 할 때도 있다. 

몇 걸음 앞서 걸어서 정신을 놓았다가는 놓치기에 십상이다.

 그가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들의 평범한 이웃이다. 

그 평범함 속에 내재된 사람의 차이에 그는 집중한다. 

그들의 삶이 평이한 것만은 아니다. 

잔물결이 시절처럼 몰려오고 어느 때는 태풍이 들이찬다. 

견디는, 애쓰는,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감독은 응시한다.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 속에서 들었던 수많은 상황과 대화의 변주가 시작된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푸르른 것은 삶의 금빛 나무라네.”

괴테의 말처럼 내게 들린 영화의 변주가 회색이 아니라 금빛 나무이길 기대한다.   





 <걸어도 걸어도ㅡ키키 키린>    



 나 죽은 지 삼 년이 되어 가는군, 다들 잘살고 있는 거지요?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 내 유작이 될 줄은 몰랐어요. 

유리가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때 우리 모두 바닷가에 놀러 갔잖아요. 

촬영이긴 했지만 내겐 재미있는 나들이였다우. 

바닷가에서 모두 손을 잡고 놀면서 뛰니까 정말 가족처럼 보이더군. 

큰딸 작은아들 그리고 막내딸, 그리고 내 아들과 며느리.

 그들을 바라보면서 서서히 죽어갔으니 참 고운 죽음이었지요. 

모래사장에 앉아 죽어가면서 했던

 ‘정말 고마웠다....’혼잣말은 사실 나의 애드리브예요. 

내 인생에 대한 나의 진심이었다 고나 할까, 

고마운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이 없애지 않고 살려 주었지.

 언젠가 눈 밝은 감독이 그러더군요. 

내가 소면 먹는 연기를 잘한다고, 먹으면서 연기하기가 쉽지 않다고, 

당연히 연기하면서 먹어야 한다고 했지,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이라고…….

 사실 평범한 일상을 표현하는 일이 눈물을 왈칵 쏟는 감정 신보다 더 어려워요. 

터무니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우리는 평소 생활 속에 있으니까, 

그것을 나는 애써 찾았어. 당연한 일상 속에서 해야 하는 것들을,

 <걸어도 걸어도>에서 내가 연기한 도시코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할머니였어요. 

부엌 시퀀스였는데 쿄

헤이(하라다 요시오분)가 욕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료타(아베 히로시분)에게 손자와 함께 목욕을 권유하고,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고서는 유카리 (나츠가와 유이)를 부르며 일어선 뒤 

쿄헤이의 흉을 보며 컵에 물을 따르고, 

찬장에서 교헤이의 약을 꺼내 쟁반에 담았어. 

고감독이 그랬지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는 모습이 정말로 엄마 같아요. 

가장 무거운 대사를 한 뒤에 훌쩍 일상으로 돌아와, 

엄마의 동작과 감정이 두둥실 움직이기 시작하죠”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이 나를 인터뷰한 책에 나와요.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를 무려 6편이나 했네요.

 <걸어도 걸어도>(2008)를 시작으로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태풍이 지나가고>(2016), 

그리고 유작인 <어느 가족>까지. 

어느 손가락이 안 귀할까만 첫 작품 <걸어도 걸어도>가 인상 깊었지. 

제목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어.

 걸어도 걸어도 인생길 보이지 않네.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네, 

걸어도 걸어도 걸어야 해. 걸어도 걸어도 또 길이 있네,  

내가 죽고 보니 <걸어도 걸어도>가 끝나더군.

 지금도 썩 나쁘지는 않지만 <걸어도 걸어도> 걸을 때가 활기찼어요.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은 참 섬세한 시선을 지닌 감독이지요. 

그 백일홍 꽃, 아이들 손과 백일홍 꽃이 함께 담긴 신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백일홍 꽃을 향하여 아이들의 손들이 솟아나고 

깊은 밤 내 큰아들 쥰빼이의 영정사진 앞에 놓여있었지. 

깜깜한 어둠을 배경으로 살포시 고개 숙이고 있는 백일홍 꽃 한 송이, 

고독한 죽음을 그보다 더 시적으로 보여줄 수는 없을 거예요. 

“저 노랑나비는 말이지, 겨울이 되어도 죽지 않은 하얀 나비가 이듬해 노랑나비가 되어 나타난 거래.” 

내가 료타에게 한 말인데 료타가 자기 아이들에게 또 전해주더군요. 

나는 그 때 그 말을 정말 믿고 싶었어. 

나비처럼 어딘가 쥰페이가 다른 모습으로 살아 있을거라 믿고 싶었거든. 

나비가 방안으로 들어왔을 때 정말 쥰페이가 들어온 것 같았어요. 그

리움이 깊어지면 마음 밭이 물러지곤 하죠.  

 모던 시네마의 특징 중 하나가 서사의 해체라고 했어요. 

얼핏 보면 고레다 히로카즈감 독의 영화는 서사에 매우 충실한 듯 보이지만

캐릭터 속에 들어오면 광속으로 해체가 시작되기도 해요.

특히 내가 연기했던 토시코는 어머니와 아내라는 역에 아주 충실한 캐릭터지만

 어느 순간 전혀 다른 모습으로 화해요.

 아이를 데리고 료타와 재혼한 새 며느리에게 부드럽고 헌신적으로 대하면서도 살짝살짝 가하는 언어의 린치, 

평생을 무게 잡으며 아내 위에 군림하던 남편의 지적 교만과 클래식함을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라는 엔카, 

그리고 그 노래 속에 배인 비밀 한마디로 박살(!)을 내버리기도 하고, 

하긴 쿄헤이의 스노비즘 자체가 허탄한 거지. 

아루히떼모 아루히떼모,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연기할 때 재미있었어요. 

 요시오를 구해주고 대신 죽은 준페이의 기일에

쿄헤이는 저런 하찮은 놈이라는 말로 요시오에게 분노를 표출하지만 

나의 분노는 더 깊고 더 컸어요. 

인제 그만 오라고 하자는 료타의 말에 나는 대답했어요. 

“겨우 십 년으로 잊을 수는 없어.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한 거야

그러니 내년 내후년에도 오게 할 거야.”

 료타뿐 아니라 관객들 모두가 놀랄 장면이었어요.

 평소의 토시코는 억압과 통제 사이에서 거하나

 어느 순간 몇 마디 말로서 운율을 변조해내는, 숏과 숏 사이에서 서사를 탈각한 캐릭터라고나 할까, 

흐르는 기타의 단순한 선율이 참 좋았지요. 

영화를 보는 사람의 정서를 증폭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고 다둑여주곤 했잖아요. 

 그나저나 고감독은 예지력이 있나 봐요. 

15년 전 작품 <걸어도 걸어도> 에서는 죽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살짝 감추더니 

<어느 가족>에서는 죽는 모습을 아주 자세히 비춰주었잖아요. 

가까이 다가올 일이라 미리 연습을 시킨 걸까요? 

 여러분들! 

모두 한 번도 와보지 못했지만, 

한 번은 꼭 오고야 말 곳에서 <걸어도 걸어도>와 함께 키키 키린이 이리 안부를 전합니다.   


<어느 가족ㅡ안도 사쿠라> 



 빔 벤더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제네시스’의 주인공인 사진작가 세바스챤 살가두는

 영감의 근원지이던 고향 풍경 앞에서 말합니다. 

하나의 풍경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어도 작가에 따라 천차만별의 사진이 나온다고요.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풍경을 보는 시각도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인데 

제겐 삶의 곡진한 은유로 읽히더군요.

영화 역시 풍경과 다름없을 거예요. 

수십억의 인구 중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개인에 대한 절묘한 가치를 부여해주며

 동시에 영화의 해석에 다양한 층위도 가능하게 합니다.

 살가두의 풍경처럼 말이죠.  

 시바타 노부요입니다. 

본래 이름은 안도 사쿠라지만 2018년 <어느 가족>에서

시바타 노부요를 연기할 때 정말 시바타 노부요가 되는 것 같았어요.  

<어느 가족>의 원제는 만부키 가족 즉 좀도둑 가족을 말하는데요. 

정말 지질한 사람들의 집합소에요. 

한집에 살지만 어느 사람도 피 한 방울 섞여 있지 않아요. 

단지 집주인 할머니인 시바타 하츠에(키키 키린분)의의 이름을 따라

모두 시바타라는 성을 쓰고 있습니다. 

불쌍한 쇼탸(죠 카이리분)는 본명조차 몰라요. 

 누추한 집이지만 우리의 안식처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나누어져 있지만 거의 한 공간이라고 해야 할거예요.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숨겨주는 유일한 곳이죠. 

하츠에 시바타의 연금이 우리 집안의 중요한 수입원이에요. 

할머니를 사랑하는 손녀(물론 친손녀는 아니에요) 시바타 아키(마츠오카 마유분)는

 거울로 자신이 몸을 보여주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고 

제가 다닌 세탁소는 워킹 셰어를 하기 시작하더니 점점 일이 줄어들어 결국 잘리게 되었어요. 

오사무 시바타(릴리 프랭키 분)은  일용직 잡부로 일하죠. 

비오니까 가지 말까? 몸도 안 좋은데? 하며 내 눈치를 보는 게으른 남자예요.

 마트에서 자잘한 생필품을 훔쳐 오는데 쇼타와 협업을 하는 거예요. 

망보고 훔치고 함께 도망치고....

그런 집으로 다섯 살 아이 유리 (사사키 유리분)가 들어와요.

 부모에게 폭력을 당하고 사라져도 신고도 하지 않는 부모와 사는 아이, 

참 사랑스러웠어요. 

유리는 사람들 사이를 붙이는 풀이라도 되듯이 결집력을 행하더군요. 

진짜 가족이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유리가 가족이 되어 가족이 하는 일 도둑질을 하려 하자 쇼타는 결심을 하죠. 

쇼타의 인식과 성장이 가족의 붕괴를 가져온 거죠. 

감독님의 철학이기도 한 삶의 양면성은 <어느 가족>에서 그렇게 드러나요. 

  내가 원했던 삶은 아니었어요. 

전남편을 만난 것도 그렇고 오사무를 만나서 정이 들고,

정당방위였지만 전남편을 죽이게 되고, 쇼타와 살게 되고, 

살다 보니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이렇게 되어있었어요. 

  구석진 집에서 우리 모두 함께 불꽃놀이를 보았죠.

 불꽃이 보일 리가 없었어요. 

우리 집에서 보이는 하늘은 너무 조그맣고 방향조차 달랐으니까요.

 봐! 저기, 안보이지만 소리를 보라고! 

우린 그렇게 함께 불꽃놀이를 보았어요. 

쇼타가 부르는 아빠 소리를 그렇게 원하던 오사무는 듣지 못하죠. 

할머니가 세상을 하직하면서 하던 마지막 말 ‘정말 고마웠어’도 우리 중 아무도 듣지 못했어요. 

학대당한 유리의 그림, 우리가 모두 그려진 그림 보셨어요? 

우린 사회나 가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에요. 우리끼리 함께 모여 살면서 그저 상처가 낫기를 기다렸어요. 

우린 어떤 가족도 아닌 그저 평범한 <어느 가족>이었으니까요.  

 쇼타를 이용해서 먹을 것을 훔치는 오사무. 

알면서도 우리 모두 그 음식을 먹어요. 

유괴죠. 길에서 떨고 있는 아이를 무작정 데려와서 키우는 것은, 

그럼 그 아이를 그냥 그렇게 길에 버려요? 

연금 때문에 사망신고도 하지 않고 집을 파서 시체를 묻는 비상식적인 행위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산사람은 살아야 하잖아요. 

 모든 일이 밝혀진 후에 형사가 묻더군요. 

“아이들이 당신을 엄마라고 불렀습니까?”

 나는 맨 얼굴을 손으로 한없이 문질렀어요. 

그들은 나를 엄마로 부르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엄마라고 불러야 엄마인가요?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어도 나는 엄마였어요. 

그 아이들은 분명 나를 엄마로 여겼을 거예요. 


 2018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은 케이트 블란쳇이

 “앞으로 우리가 찍는 영화에 우는 장면이 있다면 안도 사쿠라를 흉내 냈다고 생각하면 된다”라고 극찬을 해주었습니다.

 나도 내가 대본에 없는 눈물을 흘릴 줄 몰랐었는데요.  

 영화를 본다는 것은 소설이나 시처럼 타인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일이죠. 

그중 영화는 가장 주인공과 체화되기 쉬운 장르일 거예요. 

그래서 문학은 이해고 영화는 경험이라고 했을 겁니다. 

누구라도 영화관에서 <어느 가족>을 만난다면 가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될 거에요. 

정말 핏줄만이 가족인가, 핏줄에만 사랑이 있는 걸까, 

가족이라는 단순집합을 놀라울 정도로 확장시키는, 시각을 열어주는 영화라고 할까요.

 그래선지 황금 종려상을 필두로 많은 상을 받았었죠. 

<어느 가족>의 한 사람 시바타 노부요가 자랑스럽습니다.   




      

    <원더플 라이프ㅡ고레다 히로카즈>       



 나를 소환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긴 한참 먼곳에 가 계신 키키 키린도 거침없이 부르시길래 혹시 하고는 있었습니다만, 

에세이 평론이라,  아, 요즈음 에세이 철학이라고 자유로운 글로 철학을 하자는 분도 있더군요. 

저도 대중적인 사람이라 이런 글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전 대중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뭔가 포근하고 사람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원래 다큐멘터리로 시작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영화뿐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들은 대중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술ㅡ삶을 추구하지만 삶을 약간 떠나있는 모든 장르ㅡ에서 대중은 언제나 소외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설왕설래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영화는 대중을 가장 덜 소외시키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영화가 대중을 소외시키지 않길 바랍니다.

 아니 오히려 제 영화가 더욱 대중적이기를 바랍니다. 


 다큐멘터리 감독을 하다가 처음으로 극영화 <환상의 빛>을 작업하면서 애를 많이 썼습니다. 

특히 영화가 지닌 독특한 매력인 미쟝셴에 신경을 많이 썼죠. 

잘만하면 어떤 나래이션보다 뉘앙스나 아우라를 더할 수 있거든요. 

아름다운 풍경과 롱숏.... 그 정성은 화면에 그대로 반영됐습니다. 신기하죠, 

그런데 그 정밀함이 오히려 영화를 박제화시키더군요. 

즉 나만의 영화가 되어버린 겁니다.

 영화를 만들 때는 감독의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영화가 개봉하면 그때부터 영화는 관객의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영화가 고레다 히로카즈를 보여주고 있다면 영화는 오히려 저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환상의 빛>은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알 수 없는 무엇으로부터 소외된 남편이 죽음으로 소외에 저항합니다. 

아내는 죽은 남편으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아내는 이유를 알고 싶지만, 영화 속에서 그 답은 제시되지 않습니다.

 제시되지 않는 답은 열린 답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답이 없을 때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원더플 라이프>에서 가장 생각을 많이 한 대목이 오류를 넣을 것인가, 바로 잡을 것인가, 문제였습니다. 

눈 밝은 사람은 다 눈치챘겠지만, 대사가 엇갈립니다. 

림보, 이미 죽은 자들의 세상에 들어와 있는 아름다운 미소의 주인공 빨간 구두 기미코 할머니가 그러죠.

 오늘 이런 영화를 찍을 거라고 불단의 오빠에게 말하고 왔다는, 

극영화 시점으로는 오류이고 형식으로는 모순이죠. 

나는 그 대목에서 좀 원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오류나 모순 앞에서 사람들이 더 깊이 생각할 거라는, 

관객은 그 시점에서 감독의 시선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미코 할머니를 통하여 관객들은 림보를 더 깊이 체험할 수도 있을 거라는, 

물론 그보다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큐멘터리의 선구자 베르토프는 기계적 시선에 대한 낙관론자입니다.

 그는 키노아이, 기계의 눈이 기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을 보여줄 거라고 확신했죠. 

오랫동안 예술이 번성할 수 있는 ‘아름다운 가상’의 세계를 예술이 마침내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나는 기미코 할머니의 모순에서 베르토프의 말을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원더플 라이프>는 시나리오 공모전에 입상을 한 작품입니다.

 <환상의 빛>에 데인 후였기 때문에 나는 무척 말랑해져 있었어요. 

내 생각을 강요하는 감독이 아니라

 배우들이나 환경이 어우러지는 하모니를 바라볼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크랭크인 하기 전 600여 명의 사람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 최고의 기억은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점점 진지해지더군요. 

참 특별한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결국, 그들 중 몇을 실제 영화 속에 등장시키게 됩니다. 

당신도 영화를 보면서 이미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영원으로 지니고 가야 할 기억! 

영화 속 사람들에게 하는 질문이 관객들에게 던져졌다는 것을, 

기억은 어느 한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억은 축적되면서 에너지는 강해지고 더불어 새로운 에너지를 창출하는

즉 정신의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작용합니다. 

전후좌우 맥락과 함께 어쩌면 기억은 우리 삶 자체 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원더플 라이프>는 얼핏 보면 선택에 관한 이야기로도 보입니다. 

당신도 아마 선택을 하려고 열심히 생각했을 겁니다. 

선택이 쉬운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려워서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왜 선택해야 하는데…. 질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너무나 불행한 삶을 살아온 야마모토는 행복의 기억이 없다며 선택을 망설이면서

모치츠키에게 놀라운 화두를 던집니다.

 하나의 기억을 선택한다는 것은 나머지 기억을 잊는 것이고

그렇다면 자기에게는 그것이 천국이라는,

그말을 들은 후 모치츠키는 자신도 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와타나베의 선택은 아내 교코와의 대화 ‘앞으로 영화를 한 달에 한 번씩 꼭 봅시다’. 장면입니다. 

아내와의 관계에 대한 응시겠지요.

 모치츠키와의 마지막 만남을 선택한 쿄코의 선택은

혹시 그 이면에 자신의 젊음에 대한 애틋함도 있지 않을까요? 

신세대 이세아는 선택하지 않습니다. 

선택에 따른 책임이 싫다면서요.

 또 다른 모치츠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주인공 모치츠키는 22살 젊은 나이에 전쟁터에서 죽은 후 림보에서 53년째 살고 있습니다. 

모치츠키라는 이름은 望月입니다.

 望은 보름달이란 뜻도 있고 바라볼 망이란 뜻도 있습니다.

 모치츠키는 반달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뭐가 아름다워 맨날 그달이구먼, 시오리가 말합니다. 

두 번째 모치츠키가 하늘을 바라볼 때 달은 없었습니다.

 대신 눈이 내렸죠. 

모치츠키를 생각하듯 시오리가 망월望月을 합니다.

 보름달이 둥실 떠 있었는데 갑자기 달이 움직이더니 관리인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가짜 달이었던 것이죠. 

달을 바라보는 사람은 삶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달도 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게 아닙니다. 

가짜 달도 달은 달입니다. 

달을 보는 사람의 마음에 정말 달이었으니까요. 

 결국 모치츠키는 선택을 합니다. 

현재 림보에서의 시간을,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향하는 선택이라고나 할까요. 

영화의 말미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줄을 서서 상영실로 가던 모습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꿈중 여우 귀신들의 춤 같다고요? 

감사합니다. 

그 아름다운 장면에 연결해 주셔서. 

서브 텍스트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영화를 찍는 림보 사람들이 짧은 영화의 한 장면들에 회의하면서도 열심인 모습을

영화에 대한 저의 오마쥬로 해석해도 좋습니다.

 영화를 찍는 림보의 사람들이 실제 영화판의 사람들과 거의 흡사하죠. 

아마 각본을 쓸 때 제가 아는 영화판이 그리 스며 들었을 겁니다. 

 영화가 영화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설 때 영화는 영화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더플 라이프>는 아주 작은 성공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객들은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들었으니까요. 

비록 세상에 답은 없고 영화 역시 질문만 한다고 할지라도 그게 삶의 테제가 아닐까, 생각하거든요.

 답이 없어서 세상은 원더플 라이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갈무리>  



 ‘현실을 떠나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라고 말한 사람은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가르시아 가브리엘 마르께스다. 

환상적인 상황과 범주를 벗어난 수많은 캐릭터를 결국 자신의 주변에서 채록했다는 뜻이다.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 역시 현실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어느 가족>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방식에 따라 자식들을 사랑하는 부모의 차이가 선명한, 

그리고 환경에 의해 이미 다르게 성장해 있는 여섯 살 꼬마들이 주인공이다.

 크고 깨끗한 목욕탕 안에서 놀이처럼 생긴 젓가락 학습을 하는 '차가운 혼자'와 

초라하고 작은 목욕탕 안에서 세 사람이 같이 목욕하는 '따뜻한 함께'중 

아이들에게 좋은 삶은 무엇인가,

 수직적인 아빠가 수평을 향하여 키를 낮추며 아이에게 다가선 것도 

결국 아이가 지닌 아빠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무조건한 사랑만이 사랑이 아니라 

아이가 지닌 아주 작은 사랑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랑에 대한 섬세한 표현이다.


 <아무도 모른다>도 실제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다.

 오히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잔혹했다.

 남자와 살기 위해 거침없이 자식을 버리는 엄마, 

어린 동생들조차 몇 푼의 돈과 함께 큰아들에게 맡기고 떠나버린다. 

못된 엄마에게 모두가 다 손가락질할 때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은 다음 대화를 영화 속에 넣는다.  

-아키라(야기라 유야분) :“엄마(유분)는 정말 제멋대로야!” -

 엄마 : “제멋대로라니, 제멋대로인 건 혼자 떠나버린 네 아빠야. 난 행복해지면 안 돼?”

 아키라는 어리지만 행복해지면 안 돼? 라는 엄마의 질문에 침묵한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예수의 말에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듯이 

관객도 폈던 집게손가락을 슬쩍 걷어 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 

어른 없는 집은 아이들의 위험한 놀이터가 되었고 현실에서

동생은 친구들에 의해 죽고 시체는 벽장에서 썩어갔으나

 영화에서는 

비행기를 좋아했다며 아키라는 아파서 죽은 유키를 공항 근처에 묻어준다. 

가장 좋아했던 아폴로 쵸콜릿과 함께.  

 갇혀만 있다가 밖으로 외출한 아이들은 꽃이 피어난 잡초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말한다.

 “누군가 버리고 간 게 아닐까?”

(갇혀있는 아이들의 시선이 아니라면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상상력이다)

 아이들은 그 잡초 씨앗을 받아와서 종이컵에 심는다. 

교코(기타우라 아유)의 장난감 피아노와 유키가 엄마를 그린 그림에 오래 머물던 카메라는 

영화 속 한 장면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선한 신은 디테일에 있다는 플로베르가 기억나는 대목이다. 


  영화의 끝에도 상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숫자도 여전히 넷이다. 

이지메를 당한 외로운 소녀 사키(간 하나에)가 그들과 동행하기 때문이다. 

어떤 절박한 상황에서도, 

설령 그것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사랑과 따뜻함을 심는 고레다 히로카즈. 

아이들은 환한고 넓은 길에서 앞을 향하여 씩씩하게 걷는다. 

그들의 생명력이 그들을 성장시키리라.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으로 상영한 영화에는 멋진 배우도 1분을 넘는 영화도 없었다. 

그저 사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에 대한 순전한 기쁨과 놀라움이었다.

 뤼미에르부터 긴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영화는 흥미로운 테마다. 

어느 예술보다 문턱은 낮고 접근은 용이하다.

 고레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보면 뤼미에르의 첫 영화를 보던 사람처럼

순전한 기쁨과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우키요에는 단정하면서도 현란하다.

 관능적이면서 소박하고 저속한 듯하지만 탁월하다.

경쾌하지만 기괴할 때도 있다. 

명랑하면서도 서늘하다.

 빈센트 반고흐는 우끼요에에 반해서 <라 무스메>라는 그림을 그렸다. 

무스메는 나이가 어린 여성을 의미하는 일본어다.

‘마치 조끼의 단추라도 끼우듯이 정확한 몇 줄의 선으로 인물을 그려 

아아, 나도 몇 줄의 선으로 인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야해.’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구절이다.                 

                             고레다 히로카즈는 이 시대의 우키요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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