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고흐

by 위영

원고지 10매 정도의 글을 쓰기 위하여 인터넷 여기저기

그림 서치를 하고 집에 있는 고흐 관련 책도 두세 권 다시 들쳐보았다.

그중 가장 많은 고흐 그림이 들어있는 도록과

거기 실려 있는 논문 두 개를 집중적으로 보았다.

똑같은 책 속의 똑같은 글과 그림인데도

전혀 다른 그림과 글이 펼쳐지는 그 지점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고흐의 슬픔이

38세에 세상을 떠난 젊은이의 고독이

아무에게도 위무받지 못하고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상처 많은 젊은이가 있었다.


그건 마치 이른 아침 물안개 가득한 춘천 강가.....

에서 바라본 상고대 같다고나 할까.

햇살이 비취니 안개가 듬성듬성 모둠 지고 무리 진 안개들이 강가를 걸어서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아름답고 차가운 상고대...


그는 아버지의 권유도 있었지만 실제 목사가 되고 싶어 했다.

신학교를 가려고 했으나 몇 번 실패하고

결국 광신촌에 가서 전도사를 했다.

그는 진심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며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전도사를 하며

그의 열정적인 성향에 비추어 보면 아마도 그가 그림에 심취했듯이 그 역에 어울리는 역할을 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순결한 영혼은 뱀처럼 지혜롭지 못했던 것일까,

그의 순수한 의도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그는 어쩌면 실패자의 모습으로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도무지 주체할 길 없어 귀를 자르는 그 광기....

광기라고 혹은 조증 탓이라고 , 결국 혼란한 정신 탓이라고 쉽게 치부해버리지만

어쩌면 그는 참으로 절절한 고독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고독을 이겨내기 위한 행위가

그렇게 가학적으로 나타났던 아닐까,


국립수목원에 가면 커다란 야생의 늑대가 두 마리 있다.

얼핏 보면 정말 커다란 개처럼 생겼다.

그러나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면 정말 강한 야성의 기가 마치 향기처럼 강하게 다가온다.

비록 갇혀있지만 그 어떤 것들보다 빨리 거침없이 순식간에 세상을 달려가고야 말겠다는

결기가 느껴지는 순도 높은 야생의 생기를 내뿜고 있다..

그런 늑대의 야성을 고흐는 지니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둥글고 닳아진 조약돌처럼 이리저리 모난 곳 없이 세상과 함께 하는

조화로운 사람이 아니라

즉 이성이나 논리를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만의 호흡 저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독특한 생기

오직 그만이 지닌 에너지에 따라 생생하게 움직이는 늑대의 체취를 지닌 천재 예술가가 고흐 아니었을까,.


순수한 영혼일수록 매혹당하기 쉽다. 여리기 때문에 꺾일 수밖에 없다.

그는 신앙에 경도당했을 것이고 과부인 사촌누이... 를 보며 역지사지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내미는 허물없는 손길에 그의 순수함은 예민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남들이 무시하는 아이 딸린 창부를 긍휼히 여겼을 것이며

천박한 그녀에 대한 대우를 자신의 일처럼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그는 고갱에게도 혹했다.

자신과 전혀 다른 댄디한 그를 보며 그는 설렜을 것이다.

전혀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작품.


그러나 그에게 다가오는 모든 세상사는 우울하고 어둡기만 했다.









하다못해 아이를 안 고있는 엄마의 얼굴을 보라

그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면서도

엄마는 웃지 않고 있다.

미소도 없다.

마치 세상을 다 산 할머니처럼

자신의 신산스러운 인생을 뒤돌아 보며 슬픔에 겨워

아이야 사랑스러운 아이야

인생이란 정말 고달프고 괴롭고

슬프기만 하는 거란다.

사랑스러운 아이야

이렇게 고달픈 인생을 네 어찌 살아갈 것인가......

아이는 이제 갓 목욕을 끝낸 것 같다.

깔깔 웃으면서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까실거는

흰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엄마의 표정이 너무나 슬프다‘

엄마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이는 마치 엄마처럼 진지한 눈빛으로

엄마의 슬픔을 마주하고 있다.






고흐는 탐서가였다. 애서가였다.

호사가들 말처럼 모델료가 없어서

프랑스 소설책을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렇게 말한 사람들을 정말 저급한 호사가들이다.

피어나려는 아몬드 꽃가지 그리고 투명한 유리병 그 뒤의 책을 보라

오히려 책을 그리기 위해 그 앞에 아몬드 꽃가지를 놓지 않았을까,

마치 벚꽃처럼

(나는 실제로 아몬드 꽃을 본 적이 없으므로)

화사하게 피어나는 아몬드 꽃의 색과

책의 표지가 흡사하다.

물론 실제 그 책의 표지가 저렇게 환한 색이었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책을 꽃처럼 여기는

고흐 마음의 표현이라고 내겐 읽어진다.

양파가 있는 정물은 또 어떤가.

싹이 나며 이미 시들어가는 양파가

고흐의 어떤 상황이라면

그 곁의 책은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고흐 내면의 외침이 아닐까,

양파가 어느 한순간 짧게 존재하다가

스러져갈 물체라면

책은... 오랜 시간 사람에게 남아서

변화시키는 희망점으로

그는 양파가 있는 정물에 책을 그려 넣었을 것이다..






협죽도가 있는 정물이다.

가벼운 책 두 권이 불어넣는 기운이 범상치 않다.

책 두권이 빚어내는 고요한 힘이

협죽도의 잎들을 더욱 생기차게 있지 않은가.

마치 작가가 사랑하는 책을

쓰다듬듯이

유도화가 고개를 숙이며

책과의 키스라도 원하듯 다가선다.





고흐 노인.jpg
가세박사의 초상.jpg

책을 사랑했던 고흐

고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과

독서를 통해서 틀림없이

생의 이면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즐거움이나 기쁨보다는

고통스럽고 스산하다는 것을

밝고 환하기보다는 어둡고 우울하다는 것을,

비록 밝은 낮이 조금 길다 하더라도

결국엔 어둠에 사로잡혀 버린다는...

그래서 자신을 그린 초상화뿐 아니라

그의 인물화는 하나같이 진지한 눈빛으로

세상을 향한다.

삶이 파안 대소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 가볍고 자연스럽게 웃을 때를

제외하고는

미소 지을 일이 뭬 그리 많다는 건가.


관자를 바라보는 눈빛이건

어떤 물체를 응시하 건 간에 그들은 웃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진지할 뿐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이

오히려 사람들을 힘들고 외롭게 할지라도

그의 그림이 고귀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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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책 손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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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이 뜨겁다.

朱夏, 붉게 타오르는 태양빛 속에서 열매도 붉어진다는 뜻 이리라.

실제 여름은 열매를 맺는 열매 實을 어원으로 한다.

어쩌면 여름은 열매를 위하여 가장 필요한 시간일 것이다.

왜 이렇게 더워! 할 것이 아니라 선하고 아름다운 계절이라 여기며 오히려 더위를 즐겨 보는 것이 어떨까,

굳이 먼 길 가는 피서 아니라도

가벼운 샤워 후 대자리 위에서 읽는 좋은 책 한 권이면 최고의 여름나기겠다.


고흐도 독서를 좋아했다.

고흐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훌륭한 목사였다고 한다.

특히 저녁이면 온 가족이 함께 독서하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자신이 읽은 책 이야기를 많이 했고 그 책을 테오도 함께 읽기를 바랐다. 책을 좋아하던 고흐는 프랑스 소설을 모델로 삼아 책을 그리기도 했고

협죽도 정물이나 양파 놓인 접시 주변을 그린 정물에서도 책을 등장시킨다.

고흐는 인물화가의 화실에서 소설을 발견하지 못할 때 공허함을 느낀다며

독서는 더 많이 더 잘 그릴 수 있게 만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선지 책을 읽고 있는 인물화도 여러 점인데

그중 유명한 <지누 부인의 초상>에서 지누 부인은 낡은 책을 들고 있다.

고갱이 그린 지누 부인은 압생트 술병이 놓여 있는데 전혀 다른 분위기의 사람이다.


“내가 얼마나 성서에 이끌리고 있는지 넌 아마 잘 모를 것이다.

나는 매일 성서를 읽는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는

말씀에 비추어 내 삶을 이해하려 한다.”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속의 글이다.

고흐는 예수를 가리켜,

'어느 누구도 아닌 화가로서... 산 몸 안에서 일하는 최고의 미술가'라고도 썼다.

생 레미 요양원 시절에 그린 삐에따에 나오는 예수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그려 넣은 것은 예수를 닮고자 하는 자신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실제 고흐는 목회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성서 학교 시험에 실패했고 전도사로 봉직하던 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한 채 나와야만 했다. 그런 고흐에게 아버지는 실망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고흐가 그린 <성서가 있는 정물>이다.

어쩌면 이 그림은 그런 아버지에게 보낸 고흐의 사부곡으로도 읽힌다.

그림 위에는 이사야라는 글씨가 살짝 보인다.

고난 받는 종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이사야서 53장이 펼쳐있다고도 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고흐의 마음을 대변한 이사야서 1: 2절이 펼쳐져 있는지도 모른다.

성서 곁의 자그마한 책은 에밀 졸라가 쓴 ‘삶의 기쁨’이다.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에밀 졸라의 책을 넣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혹자는 고난 가운데 내재한 삶의 기쁨을 의도했을 거라는 절충안을,

어느 평론가는 성서=신앙과 문학을 종합하려 했다면서 문학이 성서와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보총 하려는 의식의 소산일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그림은 의외로 단순하다.

불 꺼진 초는 아버지의 생명이 끝났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촛대는 무겁고 장중하며 권위적이다.

평생을 우직한 모습으로 성경을 바라보며 성경과 동행했을 아버지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드커버의 성경은 크고 강인해 보인다.

생명을 향한 말씀을 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권위 있는 모습이다.

거기에 비해 에밀 졸라의 책 ‘삶의 기쁨’은 얼마나 가볍고 경쾌한가.

환하고 밝은 색깔이 마치 금방이라도 머리카락 나풀거리며 품에 안길 사랑스러운 소녀 같다.

고흐는 의도했을까,

성서와 대비된 삶의 기쁨이 얼마나 작은 것이라는 것을,

사람을 미혹시키지만 그 생명이 짧다는 것을,

경쾌하고 사랑스럽지만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존재라는 것을,

무엇보다 성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어둠으로 치환되는)과 삶의 기쁨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아름답고 고귀해 보이는 성서는 반석처럼 당당하다.

책상 귀퉁이에 가볍게 얹어져 있는 삶의 기쁨은 금방이라도 책상에서 떨어질 것처럼 보인다.

선택은 당신들의 몫이지만.....

그래서 나도 삶의 기쁨을 좋아해서 그 길을 따라 걸었지만....

"성서가 있는 정물"은 마치 고흐의 신앙고백처럼 읽힌다.


<맨 아랫부분의 글은 연재물로 교계신문에 게재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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