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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Dec 14. 2021

두려움이 출몰하는 달

12월






가끔 리브로피아라는 앱에서 전자책을 읽는다. 

새로 막 펴낸 신간 서적은 아니더라도 좋은 책들이 즐비하다. 

도서관에 가는 수고는커녕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선택한 책이 수욱 휴대폰 속으로 들어와 

읽기 좋은 모습으로 펼쳐지니 이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이즈음엔 외출할 때도 핸드백 속에 책을 넣지 않는다. 



인터넷은 공평과 자유의 대명사라고 해도 충분하다. 

공부하고 노력해야만 알 수 있던 지식들이 순간에 내 앞으로 주욱 펼쳐진다. 

언젠가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나오신 분이 그랬다. 

전에는 머릿속에 든 지식으로 아는 척을 할 수 있었는데 

요즈음은 검색 일 초면 모든 게 나오니 아는 게 아는 것이 아니라고, 

재미있는 농담으로 현대의 정치 평론가는 택시 운전기사라는 말도 있다.

 종일 라디오와 벗하며 정제된 수많은 정치 평론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글을 쓸 정도는 되지 못하더라도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는 훌륭한 평론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식 소매상인 스마트 폰이 손안에 있으니 어느 사람도 지식 앞에서 밀리지 않는다. 

물론 이제 학력의 시대도 갔다. 

전체적으로 고학력일 뿐 아니라 너무나 많은 정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새로운 정보를 더 많이 아는 것보다 알고 있는 정보를 선택하고 버리는 것이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목사 아내가 되면서 쇼프로그램을 딱 끊었다. 

클래식만 듣고 찬송가와 복음성가만 음악이라고 생각해서다. 

그게 무슨 순전한 모습일까만,

 그래도 또 어느 부분. 시절이 주는 순전한 마음의 상태였으리라 생각하기도 한다. 

 근 이십여 년 중원(?)을 떠났다가 신문을 읽으며 세상을 아는 것처럼 

유행가가 삶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이가 주는 자유로움이었을까, 

경직되어 있던 몸이 살짝 풀린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경직을 싫어하나 나는 여전히 이 경직이 삶에 꼭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불후의 명곡’이라는 텔레비전 프로를 즐겨본다. 

최선을 다해 노래하는모습도 아름답지만 

저 노래를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백조의 발짓을 나는 바라본다.  

 ‘불후의 명곡’은 노래뿐 아니라 패널들의 수다가 질펀하다. 

처음에는 좀 거슬렸는데 이즈음에는 흠~~ 하며 그들의 수다를 감초처럼 여긴다. 

노래를 듣고 그 노래에 대한 가벼운 평을 서로 주고받는데 그 평과 반응이 천차만별이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는 가수라 할지라도 몇 마디 말이면 노래 실력과는 다른 그 사람의 그릇이 보인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완전한 평가는 아니겠지만 

독서를 하는가, 생각하는가? 

말 몇 마디 속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보게 되어 바보 상자라고 하나 

텔레비젼은 바보상자라 투명한 미러링을 하는지도 모른다. 



차이나 구별보다는 공평이나 공존을 지향하는 사람이라 

굳이 이런 부분을 나누기는 좀 그렇지만 지성과 지식의 차이는 분명 있다. 

지식이 날것이라면 지성은 체화된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지식은 얇고 가벼우며 지성은 깊고 저절로 배어 나오는 향기와도 같다.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지만, 지성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지식은 배려가 없지만 지성은 배려가 있다. 

요즈음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도로 지적 척도를 재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소박한 풍경 앞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자와 

평범해서 스쳐 지나는 사람들과 삶의 밀도 차이는 자명할 것이다. 

한 장 남은 달력의 날들이 거침없이 흐르고 있다. 

잘 살아온 건가,

두려움이  출몰하는 달이다. 

십이월은,

(교계 신문 연재글)

사진들은  12월 완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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