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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Nov 30. 2021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라는 책 제목에다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물 때’라고  읽는 동안  ‘세상을’ 넣고 있었다.

이 작은 우연과 착각은  작은 의문을 내게 준다.

모든 저녁은...정말 세상의 것인가, 모든은 세상을 품고 있는가,    


새벽부터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겨울비 답지 않게 세찬 비. 

몇 년전에 블로그 닉이 겨울비인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겨울비라는 아디를 정했을까, 그 스산한 느낌을,  

온도가 낮지는 않지만 눈 내리는 날보다 더 싸늘하고 더 차가워 쌍클한 기운이 완연한 겨울비,

경험이 정의한거지만 겨울비는 우선 드물고 차가운 날 조금씩 내리는 것이다. 

드물게도 그녀 겨울비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겨울비 내리니 그녀가 생각나고 이책을 읽는 내내 죽음을 생각하니   


<모든 저녁이 저물 때>는제목이 나타내 주듯이 죽음에 대한 서사로 대단히 용감한 글이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신이 주셨고 신이 거두어 가셨다.

준것만큼 거둬가신것이 아니라 더 많은것을 거둬갔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아이의 죽음 앞에서 여인은 그 아이가 지닌 채 살아갈 미래의 모든 것을 바라본다.          

아이의 미래뿐 아니라 그 아이가 살아갈 세상도 다 보인다. 

뿐 아니라  아무때나 어머니의 세상과 할머니의 세상도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것도 거대한 힘을 가진 태풍속의 파도다.  

그 참혹한 고통을 서사하는 솜씨가 참으로  비범하다.  


 ‘모든 저녁이 저물 때’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유아 돌연사를 하는데 

작가는 만약에를 동원해서 눈 한줌으로 아기를 살려낸다.

아기는 빈에서 젊은 여인이 되어가는데 그녀는 또 어느 순간 자살한다. 자살일까? 

죽음에 대한 표현이 죽음보다 더 놀랍다. 

자신을 피부 속에 가둘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녀 앞에 허름한 문이 열렸다. 

그녀는 자유를 얻었다. 

작가는 또 만약에를 동원해서 그녀를 자유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 피부 속에 가둔 것일까, 

그리하여 그녀는 공산주의자가 되고 

스탈린 시절 다시 학살의 희생자가 된다. 

작가는 다시 그녀를 살려내 번역가 라디오 방송가, 작가가 되게 만들고   

러시아 시인과 만나 아들도 얻게 한다.  

다시 60세가 되어 그녀는 계단에서 떨어지고 그 때 명부의 구멍이 열려 그녀를 품는다. 

그런 그녀가 그 순간을 우연히도 용케 피해간다면 

그녀는 결국 아흔 살까지 살게 된다.

고독한 늙음. 명료한 의식으로 말을 해도 아무도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녀는 약한 기운 때문에 손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약한 육체 속에 갇힌 명징한 의식.

그러나 사실 그 의식도 이미 과거의 기억 속 편린들이다.   

작가는 만약과 우연을 매우 하찮게 여기는 듯하다.  

그 하찮은 우연이라는 것에서 한 생명을 집어 삼키는 죽음, 

명부의 <구멍>이 열리는 것에 

그녀는 분노하는 것일까,

명부의 <구멍>과 온몸의 <구멍>을 그녀는 함께 보았던 것일까? 

괴테의 시 <신과 바야테르>는 시를 떠나 그녀의 존재에 존재감을 더해주는 어떤 신앙 같기도 하다. 

신 대신 택한 시는 작가에게 무한 자유를 주었으리라,  

그녀는 우연히 다가온 죽음을,  

우연 속 하나를 살짝 제쳐 자신이 죽였던 여인을 

만약, 만일, 혹시, 라는 경우 수= 막간극으로 다시 살려낸다. 

번역가 배수아의 표현대로 라면 허구의 허구다. 

이 단순하면서도 낯선 구조는 작가의 문체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맞서 팽팽하다.    



  예니 에르펜베크

낯선 이름이다.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예니라고만 기억하면 기억이 될까? 

나이가 드는 일중에 마치 주름 생기고 모든 피부가 쪼글거려지고 쳐지는 것처럼 

확실한 일 하나가 <기억>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이름과 장소가 그리고 때가 그 모든 고유명사가 내 뇌에 자리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아니다. 내 뇌가 그들을 내치는 것일 게다.

이제 그만 니들 자리는 없어,  

이미 과부하야,

새로운 세포를 혹은 기억자리를 만들어줄 힘도 없을뿐더러

있는 자리도 비워주어야 해, 


글을 쓰다보니 겨울비가 그쳤다. 

비가내려서 걸어서 도서관에 가려고 했는데. 

삼백 미터 정도에 있는 마두 도서관 말고 2킬로 정도 걸어야 하는 일산 도서관으로

책도 반납해야 하고 비내리는 밖을 내다보며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았는데 

비가 그쳤다.

어느 누군가의 죽음도 그쳐졌을까?

     

(그런데 그 수많은 우연은 결국 섭리가 아닌가. 

섭리를 인정하는 것은 비겁함이라고,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사유 속에서 비롯되어진 일인데,

우리에게 할당된 몫= 생로병사 라는 것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시선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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