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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Dec 25. 2021

끝없음에 관하여

로이 앤더슨



<끝없음에 관하여>를 보는 동안 아주 오래전 보았던 <네 번>이란 영화가 떠 올랐다. 

<네 번>은 사람들의 대화가 거의 없던 영화였다. 

이탈리아의 깊은 산골, 염소 방울 소리와 늙은 목동의 기침 소리, 그리고 바람 소리, 

늙은 목동은 교회의 먼지를 우유와 바꿔와 술에 타서 마신다. 

먼지는 먼지와 같은 삶이나 먼지화 되어가는 죽음을 은유하는 듯 했지만 늙은 목동에게 그런 은유가 있을 턱이 있나. 

먼지를 얻지 못한 날 목동은 죽고 

염소들이 그의 방에서 그를 배웅한다. 

사람 사는 방으로 염소가 들어선 모습을 참으로 생경했다.

 그날 아기 염소가 태어나는데 아기염소는 무리에서 벗어나게 되고 전나무 아래서 죽는다. 

전나무는 잘 자라나 마을 축제에 사용되고 숯이 된다. 

고요하고 느리게 자연의 순환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뉴욕 라이브러리>는 206분의 다큐멘터리. 

헤이리 시네마에서 몇 안 되는 사람으로 시작했으나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DMZ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는 

네시간을 꼬박 한 늙은 남자가

자신의 방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기(듣기?)도 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느린 영화도 좋아해서 여러 편을 봤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였다. 

서사는 영화의 가장 근본적인 도구라고 여기는 내 생각을 사정없이 뭉개버리는 영화였다.

 처음 대하는 영화의 현대미술이라고나 할까, 

첫 장면은 샤갈의 그림을 오마주 한 듯 햇는데 

북유럽의 하얀 남자가 하얀 여자를 안고 안개 위를 느리게 떠다니고 있었다. 

아름답고 구슬펐으며 서늘하면서 쓸쓸했다. 

포스터이기도 한 그 장면은 매혹적이어서 영화의 기대치를 한껏 높여주었다.

 계단을 힘들게 올라오던 살찐 남자가 갑자기 나를 향해 대사를 읊는데 

뭐야 이것은 연극인가, 

길거리에서 여러 사람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거대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 그리고 채찍질 하는 사람, 유별나게 채찍질 소리가 강렬하다. 

마치 내 몸을 후려치는 것처럼,

 사제의 꿈이다. 

사제는 에배하기전 술을 병채 마신다. 

비틀거리며 예배를 인도하나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다. 

믿음을 잃었어요. 그래서 악몽을 꿔요. 

의사는 말한다. 혹시 신이 없는 게 아닐까요? 

아들의 무덤 앞에서 늙은 부부의 모습, 

생일파티에 가는 딸아이의 풀린 신발 끈과 사정없이 퍼붓는 비, 그리고 날리는 우산, 

히틀러의 말년과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포로들, 

짤막한 꽁트들이 건조한 나레이션에 의해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설마 이렇게 계속 되려고? 

눈을 부릅뜨고 보았지만, 감독은 끝까지 한 남자가 있다. 한 여자가 있다. 를 견지해 나갔다. 

대단한 뚝심이다. 

영화는 76분으로 짧은 편이다. 

여러 인물을 보여준다. 홍보 담당자이자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 

그러나 영화에서 그녀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유가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은행을 믿지 못해 침대 매트리스 아래 돈을 보관해 놓는 남자,

 아직 사랑을 찾지 못한 젊은이, 

“한 남자가 있다”, “한 여자가 있다”로 시작하는 내레이션과 함께

해당 인물의 삶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혹시 감독은 영화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도 브뤼헐의 그림을 생각했던 것일까?

 평면의 그림 아래 숨겨져 있는 수많은 스토리들, 

그들이 연결되거나 연결되지 않거나 상관없이 

평면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으로, 

스토리를 벗어날 수 없는 영화라는 판을 깨고 싶었던 것일까, 

줄거리나 맥락이 위선이라고 여길수도 있겠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강물은 저 혼자 흘러가고 있고 사람들을 품었다가 놓았다가 스쳐 지나갈 뿐인데, `

거기 무슨 연결이, 소통이, 관계가 있을 거라고, 

결국 사람 안에서도 감정은 저만의 갈래로 움직이고 이성 역시 자기만을 고집하지 않는가,


카메라가 한곳에 고정되어 있다. 

마치 카메라가 움직이면 안된다는 듯이 

아니 움직이는 카메라는 사기꾼이라는 듯이 

카메라가 혹시 의도하지 않는 것을 비춰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카메라가 정직해도 관객은 보고싶은 것을 보게 마련이다. 

그러니가 감독은 일필휘지를 꿈꾼 것인지도 모른다. 

 한 장면 속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각오로 

카메라 앵글을 꼭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도 사소한 개념들을 꼭 잡고 살고 있지 않는가, 

가령 나는

‘아 상냥한 사람이 좋아, 나도 좀 더 상냥한 사람이 되어야지,’ 

열심히 생각하며 살고 있지만 상냥하지 못할뿐더러 

정말 상냥한 것이 왜 좋은가 그 단순한 답은 알지만 깊이 있는 답은 모르며 

설령 또 깊이 있는 답을 안다고 할지언정 

그 답이 옳은가도 모르며 

설령 그 답이 옳다 한들 그게 또 무슨 유익함이 있을 것이며 

유익함은 또 무엇인가.....말이지. 


영화를 보고 난 후 한 참 뒤에 든 생각인데

혹시 이 감독은 관객에게 퍼즐을 제공한 것인가, 

자 영화를 봤으니 이제 퍼즐을 맞추시오

그러나 답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맞추는 답이 바로 답입니다. 

전제 조건은 있지만 그러나 답이없는 퍼즐, 혹은 열린답의 퍼즐, 

어쩌면 감독도 자신만의 기호로 퍼즐을 맞춰 나가고

때마다 시간마다 다른 모습의 문양으로 맞춰지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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