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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pr 18. 2022

초록나무들

모리스 드니, 숲속의 예배 행렬 1893

 


 숲에 들어서면 온몸으로 호흡을 하게 된다. 길게 내뿜고 다시 저 안 깊숙이 들이쉬는, 숨을 인식하는 호흡이라고나 할까, 기계적으로 쉬는 숨과는 달리 숲속에서의 호흡은 생명을 느끼는 숨이다. 어느 날 햇살이 문득 따사롭다고 느낄 때, 무엇인가가 잡아끌 듯 죽단화로 눈길이 가는 순간, 말라 죽은듯한 가지들이 연푸르게 변해 있고 새움이 도톨도톨 솟아나 있을 때, 탄식할 수밖에 없다.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아가서의 어느 대목이 새순처럼 내 안에서 솟아나고.  


숲은 가장 좋은 예배 처소가 아닐까,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도 저 혼자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지는 푸나무들, 계절에 순응하며 자연스레 순환 변화되면서도 지극히 고요한 숲, 그래서 창조주의 손길을 가장 예민하게 보여 주는 곳, 그래서 죠이스 킬머는 노래했다.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를 결코 보지 못했다고, 나무는 온종일 하늘을 우러러 잎이 무성한 두 팔을 벌려 기도한다고, 나무를 만드는 건 오로지 하나님뿐이라고, 실제로 모리스 드니는 숲에서 신령한 기운을 느꼈고 숲을 영적인 장소로 여겼다고 한다. 브르타뉴 숲만 그럴까, 한때 나도 북한산을 홀로 자주 걷곤 했다. 숲의 고요함과 적막함 나뭇잎들이 바람과 함께 지어내는 유구한 소리들은 주님을 묵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최적의 장소라는 것을 실감하곤 했다.  


 모리스 드니의 <숲속의 예배 행렬>이다. <초록색 나무들>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모리스 드니가 자주 가곤 했다는 브르타뉴의 너도밤나무 숲을 그린 그림이다, 이렇게 간결한 숲이 있을까, 이렇게 단순한 나무가 있을까, 나무들은 쭉쭉 뻗어 하늘까지 닿아 있다. 그러나 조금 유심히 보면 정말 나무일까? 저 숲의 나무는 우리가 알던 나무가 아니다. 선명하고 신비로운 초록색 나무다. 장소를 구획해 내는 수직의 선들과 강렬한 색채가 미묘한 리듬감을 주고 있다. 아웃라인 처리로 일러스트 느낌이 약간 나지만 그래서 더욱 몽환적인 느낌이 가득하다. 하늘까지 거침없이 솟아 있는 초록색 나무들은 온몸을 곧추세워 찬양하며 주님이 계시는 하늘나라로 전진하는 듯 보인다. 나무둥치는 크고 의연한데 나뭇가지들은 거의 없다. 잡다한 사념들을 제할 때야 그분의 뜻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다는 삶의 굵은 갈래를 보여 주는 것일까,  나무 사이로 비치는 흰 구름과 푸른 하늘의 대비가 절묘하면서도 풍성하다. 단순하게 처리된 먼 데 있는 숲은 나지막하다. 세상은 온통 나무와 하늘 그리고 숲뿐이다. 거기 소녀들ㅡ 흰옷 입은 소녀는 결국 사람이 지닌 어떤 절대적 순수성을 표방해 주는게 아닐까ㅡ이 있다. 그들은 아주 경건한 자세로 예배하며 걸어가고 있다. 우리의 예배가 주님께로 향하는 길이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앞장선 한 소녀는 이미 천사와 대면하고 있다. 특별한 소명을 받았던지…. 아니면 아주 특별한 은총의 시간일 것이다. 혹은 무리와 있을 때보다 홀로일 때 더 그분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날개를 활짝 편 천사는 짙은 초록의 선, 혹은 검은 담을 사이에 두고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모리스 드니는 루브르 박물관을 자주 방문했으며, 특히 프라 안젤리코, 라파엘 및 보티첼리의 작품에 감탄했다고 한다. 열다섯 살 때 그는 자신의 일지에 적었다. “나는 기독교 화가가 되어야 하며, 기독교의 모든 기적을 축하해야 하며, 그것이 필요한 것이라고 느낍니다."

 모리스 드니는 나비(Nabis)파를 결성한 멤버이다. 나비는 히브리어로 선지자를 뜻한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화가들의 모임으로 이전까지 주류였던 자연주의의 사실적이고 묘사적인 화풍을 배척했다. 특히 작가 자신이 영혼의 형상들을 묘사했다고 말한 <숲속의 예배 행렬>은 보이는 대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었다.  그 시절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상파의 영향도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단호해 보이는 정사각형의 화폭은 근대적 회화의 선언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면과 관념을 직시한 작품으로 영성 풍부한 작품이다.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신령한, 마음에 평화를 준다. 무엇보다 깊이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다. 참으로 신비로운 색이어서 화면으로 보는 작품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전시회에 갈 때마다 원화가 지닌 아우라를  생각하지만 특별히 모리스 드니가 아주 젊은 시절 그린,  작가 자신이 평생을 소장했던 초록나무들은 꼭 한번 원화로 보고 싶다. 

 드니는 위대한 고대 회화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을 계속 그렸고, 샹젤리제 극장과 쁘띠 팔레 (Petit Palais) 극장의 장식을 집행하기도 했으며 교회를 위한 수많은 대형 벽화에 전념했다. 1919년에는 조르주 드발리에르와 함께 종교 미술 화실을 세우기도 해서 프랑스 종교 미술 부활에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숲에 들어서면 나무를 사랑하게 되고 순간의 방랑이고 떠남일지라도 나무의 세계로 귀의하게 된다. 조금 더 오래 깊게 나무를 느낄 수 있는 여여함이 있다면 그를 만드신 창조의 세계도 반드시 일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찬찬히 들여다본다고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은총의 시간은 순간에 열리고 닫힌다. 기다리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지혜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적 변이로 이어질 수 있는 고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숲이다. 시간 속 내일에 대한 꿈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아득한 세월 밖의 세월을 바라볼 수 있는 곳, 그래서 생명과 부활을 경험하게 하는 곳. 

 

 생명으로 가득 차서 생명을 느끼게 하는, 

숲이 가장 아름다운 오월이다. (교계신문 연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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