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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un 16. 2022

해거름 덕수궁

장-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



해넘이가  해가 거의 저물어갈 무렵이라면 그보다 조금 더 환한 빛이 있을 때가 해거름이다.

그러니까 내가 덕수궁에 들어설 때가 여섯 시 조금 넘어서였다. 

유월은 한 해중 가장 해가 긴 달이다. 

아직 환하지만 낮은 아닌 시간 

해가 주섬주섬 햇살을 거두어 들이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덕수궁 문 안으로 들어서면 고운 자갈이 깔린 넓은 길이 주욱 앞으로 나서는데 

그 길이 평소와 달랐다.

거의 언제나 사람들이 많아서 저잣거리의 소란스러움을 지니고 있던 길인데

고요했다.

누군가가 덕수궁 길에 깔려있던 소란이라는 공기를 싹 걷어내고 

고요라는 새 공기를 막 주입한 듯 했다.

아니 해거름 때를 기다린, 문맹 속에 던져진, 아주 짧은 시간에 현현한,

시간의 시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이 내보내는 고요의 기척으로 미미하고 옅은 자연의 암향.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듯 바로 앞 주욱 뻗은길로 들어서는 대신 오른쪽으로 걸어간다. 

모란 나무가 있고 카페가 있고 그리고 연못이 있는 한적한 공간, 

올봄에도 덕수궁에 핀 모란을 봐야지 했는데 어느새 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모란 열매를 보며 다시 생각했다. 내년 봄에는 꼭 봐야지, 

꽃의 그 짧은 생명을 그리워하는 것은 삶의 유한을 인식하는 일이 아닐까,

그리하여 꽃을 보며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고요와 적막이 해거름의 아주 짧은 찰라에 스미는 것처럼,

     

요즈음은 카페에 가면 그 집 만의 티가 있나 살펴보곤 한다.

박하감초차는 어때요? 맛이?

깔끔해요.

차를 한잔 받아들고 연못으로 나왔다. 

어리연꽃 이파리가 온 연못을 다 덮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굵은 황금빛의 왕관들이 연못 위에 떠 있었다.

아 이 작품이 바로 정원과 정원?

예측한대로 장-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의 한 작품이다.  

세 개의 황금 왕관이 황금 연못을 만들어주는 것일까, 

굵은 황금 목걸이도 나무에 걸려 있다. 염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소문 시립 미술관과 연계해 전시를 한다해서 

정동극장에 가기 전 시간을 잡고 덕수궁에 들어왔던 것이다.


첫 느낌은 참 쌩뚱 맞다. 

나무에 걸린 황금 목걸이는 몇 년 전 러시아에서 닥터지바고를 쓴 파스테르나크의 생가를 가면서 들렸던, 

이름도 읽을수 없었던, 러시아 동화작가의 집을 떠올렸다.

 그집 정원의 한나무에는 크고 작은, 숱한 모양의 어린아이들의 신발이 걸려 있었다.

 아니 이게 뭐지? 무슨 뜻이지?.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내 추론으로는 부모들의 애달픔에서 시작된 사랑의 표현,

사장되어가는 기억의 현장,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위무의 행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정말 묘한 귀기를 느끼게 하던 제주도 와흘리 팽나무에 저 황금 목걸이를 걸어주면 

더 주술적으로 보일까?

연못가  벤치에 앉아 박하차를 마셨다.

박하 냄새가 화하니 나면서도 감초 맛은 그다지 없었다.

저 어리연꽃의 이파리들, 저 가벼운 어리연꽃 잎들 위의 황금 연못이라니....

황금도 아니면서 황금인 체 하는 황금 목걸이라니...

내 안에서 잊혀져가는 기억을 불러오는 것이 예술의  힘인가, 

괜찮네, 괜찮아, 박하차도 연못위 구슬도 그래 안괜찮은 것이 무어람,  

  

혼자가 좋은 것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앉아 있고 싶은 만큼 앉아 있다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뒤안을 걸어서 석어당 쪽으로 간다. 

오메, 익어가는 노오란 살구가 가득가득가득 열려 있다.

얼마나 눈부셨을꼬, 살구나무 꽃 피었을 때  

하늘을 향해 둥글게 구부러지며 날아갈 듯한 이층집 목조 지붕 깃과 함께 살구나무 가지를 담아 본다.

그리고 아주 특이해 보이던 살구나무 수피도,

나무도 잘 보일 때가 있다. 

꽃필 때도 그렇지만 

열매 옹기종기 나뭇잎 사이에서 자라날 때도 그렇다.

마치 갓 태어난 새아기들처럼  열매들이 어여쁘다. 

익어가는 열매는  그 존재로 깊은 사유의 자락을 보여준다. 

석어당 뒤안을 지나 오래된 회화나무를 쳐다보고 중화전을 옆으로 두며 걸어서 대한문을 나섰다. 


정동극장 가는 길에는 해넘이가 되어 있었다.

녹음짙은 나무들은 연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비록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지언정

사람들의 뒷모습은 낯선 도시의 여수를 즐기는 모습으로 내겐 비쳤다. 

정동극장의 감나무 역시 아기 손바닥 같은 앙징한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세상은 존재하고

삶은 움직이며 그 둘은 연합하여 생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가곡몇곡과 강석우가 쓴 가곡 일곱 곡을 

강석우 사회로 가수들이 노래했다. 

뭐 그리 큰 감명은 없었지만 좋지. 괜찮았다.

작은 농담에 사람들은 웃고 강석우는 아 이 수준이시군요. 그러면 진작 잘할 수 있었는데....

수준이란 단어를 그것도 대중을 향해서 그것도 약간 낮은 위치로 향하게 하는 것은

청중보다 오히려 사회자의 급을 떨어트리질 않나.

나오면서 눈에 좀 띄는 중년의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의 가느다랗고 길다란 클러치 백이 마치 그녀의 얼굴처럼 인상적이었다. 

 생각해보니 강석우의 아내였다. 

아 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도 있었지.


정동길을 돌아서 나오는데......초여름 밤이 깊어 있었다. 

역시 별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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