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
스포츠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 하는 것도 보는 것도 그렇다.
나라별 경기나 세간의 화제를 부르는 스포츠 경기도 챙겨서 보지 않는다.
가령 축구를 보더라도 너무나 긴 시간 동안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이 즐겁다기보다는 힘들다.
세상에, 경기장에서 뛰는 사람도 있는데 이 얼마나 소심한 양태인가.
그러니까 이것은 순전히 취향 문제일 것이다. 생선 역시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비린내 때문인데
내 주변인 중에는 비린내가 좋아서 생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몇 년전 연천 화가 댁에서 임진강 민물장어를 맛볼 기회가 있었다.
워낙 음식 솜씨가 좋은 종가댁인지라
애벌구이를 해가지고 다시 한번 더 숯불에 살짝 구워 나왔다.
쉬 먹을 수 없는 귀한 보양식이라 한입 먹었다.
세상에, 살이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입안에서 퍼졌다.
그런데, 그래도, 장어 특유의 냄새, 혹은 민물생선의 비린내가 느껴졌다.
그래서 그 귀한 요리를 한 입 먹고 말았다.
어쩌면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냄새를 즐겼을것이다.
내가 가끔 챙겨 보는 것이 스모라고 하면 사람들은 다시 되묻는다.
스모? 일본 씨름? 거대한 뚱뚱이들이 다 벗고 하는 시합?
그러면서 참 괴이한 취미라는 표정을 하나같이 짓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모를 봐온 지가 거의 십여 년이 되었다.
우리 교회 젊은 친구는 일본 만화를 즐겨 보다가 일어를 잘하게 되고
그 힘들다는 서울 교육대학을 들어가서 초등쌤이 되려다가 결국 일본 회사에 취직을 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는데
그렇다. 나는 서당개도 되지 못한다.
어리석게도 요코즈나横綱를 횡강으로 읽는다든지 리키시(力士)를 역사로 읽으며 본다.
그런데 그렇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언어 속에서 스모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특히 리키시가 잘보인다.
그들의 모습 눈빛, 수건으로 땀 닦을 때의 포즈, 소금을 뿌릴 때의 양이랄지,
관중을 바라볼 때의 시선 같은 것을 자세히 관찰하면 력사의 성격일지, 게임에 임하는 자세가 보인다.
무엇보다 다치히리ㅡ벌떡 일어서서 맞부딪히는 그 순간ㅡ보다
시키리ㅡ기 싸움, 눈치작전으로 다치히리 전ㅡ가 흥미롭다.
어느 요코즈나는 시합 전 커다란 기침으로 게임이 시작하기 전 상대방을 제압하곤 했다고 한다.
요코즈나가 되면 컨디션에 따라 결장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요코즈나를 이기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요코즈나를 이긴 사람에게 관중들은 머리 위로 방석을 던지며 리스팩트한다.
요코즈나를 이긴 선수는 그 자체로 놀라운 스팩이 되며
연봉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게 된다.
스모는 도효(씨름판)에서 리키리(력사)라 불리는 씨름꾼 두 사람이
샅바의 일종인 마와시(廻し)를 입고 힘을 겨루는
우리나라 태권도처럼 일본의 국기이다.
도효에 오르면 양다리를 쩍 벌리고 한 발씩 들었다가 지면을 강하게 내리밟는 시코(四股)라는 작은 의식을 한다.
시코는 스모 훈련방법의 일환이기도 하며,
민속적으로는 땅에 깃들어 있는 사악한 영령들을 짓밟아 멸한다는 의미도 있고,
초봄 무렵의 대지를 깨워서 한 해의 풍작을 약속받는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게임의 룰은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다.
상대를 도효 밖으로 밀어내거나,
넘어뜨리거나 던져서 상대방이 발바닥 외의 신체가 땅에 닿으면 진다.
보통 150KG이 넘는 몸무게니 그 체격이 눈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처음에는 거대한 육신, 엄청난 배와 여자 가슴보다 더 큰 가슴, 마와시도 매우 민망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들의 체격을 아름답게 여겼다.
페리 제독이 일본에 처음 들어왔을 때 막부에서는 그들 앞으로 리키시들을 내보내 쌀을 나르게 했다.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그림이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미군들은 리키시를 매우 신기하게 여겨 살을 만져보기도 했고
어느 군인은 리키시의 쌀 위로 올라가 앉아 있는데
리키시는 그런 그를 쌀가마니와 함께 가볍게 나르고 있다.
어쩌면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작은 체구 때문에
스모라는 특별한 경기를 만들었고 더욱 장려했는지도 모른다.
커서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대리만족 같은 것,
스모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한다면
아주 짧은 순간에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내가 스모를 시청하는 이유 중에 들어가리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단 몇 초 이내다.
우리나라 씨름이 한번 진 것으로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워서
적어도 두 번정도는 져야 손을 드는 삼판양승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단숨에 스윽 베어내는 칼문화의 단면이 아닐까,
스모의 황제는 요코즈나다.
그 자리에 오르기도 어렵지만 오르고 나서도 요코즈나 다운 품격을 요구한다.
특히 요코즈나 다운 정면 승부를 해야 한다.
헨카(変化, 회피기)나 기술을 썼다가는 요코즈나답지 않다고 사람들의 입살에 오르내리게 된다.
그래서 조금 날렵한 몸매를 지닌 사람들도 요코즈나에 오르면
정면 승부를 하기 위해서 오히려 체중을 더 불리는 경우도 있다.
1990년대, 일본 스모는 어마어마한 체중을 무기로 앞세운 하와이계 선수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넘치는 피지컬로 밀어내는 스모가 주를 이뤘는데
이 때 스피드와 테크니컬한 스모로 식어가던 인기를 되찾아온 것이 바로 몽골 선수들이었다.
몽골은 전통적으로 장사가 많이 난다는 글도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중량을 이길 수 있는 기술은 없다>는 것이 스모의 정설이다.
69대 요코즈나 하쿠호는 몽골출신으로
45회라는 최대 우승과 수많은 전승등 스모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러나 그는 팔꿈치를 쓰거나 사소한 기술을 통해서
‘이기기 위한 스모’를 해서 사람들의 눈총을 맞곤 했다.
지난 2주 동안 시간이 되는대로 NHK에서 스모를 열심히 봤다.
거대한 몸들이 부딪히는 순간의 게임은 볼수록 매혹적이다.
74대 요코즈나 테루노 후지도 몽골 출신이다.
1991년생으로 192cm/185kg의 놀라운 하드웨어와 강한 악력을 바탕으로 상대를 압도한다.
도효에 올라 몸을 굽히고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빛은 날카롭기가 마치 징기츠칸의 눈빛 같다.
도효 아래서 그는 제왕이다. 차갑고 무감각한 표정은 마치 황제처럼 권위가 넘친다.
그의 등 뒤에서 부채를 부치고 그의 땀을 닦는 수건을 든 사람이 있으며
그가 앉을 방석을 들고 따라다닌다.
그러나 도효 위에 서면 그는 홀로다.
아무도 그를 돕지 못한다.
어느 스모선수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리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절체절명의 고독한 시간!
그리고 그 고독한 시간을 이겨야 그는 황제의 자리에 다시 안착할 수 있는 것이다.
스모를 보다가 문득
우리의 윤대통령도 체격이 좋은데......
도효 위에 오른 요코즈나가 아닌가.
대통령 앞에 닥친 절체절명의 고독한 시간이 많을 텐데,
그리고 그 고독한 시간에서 승리해야 할 텐데......
설마 아직도 자신이 도효 위에 오른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아니 선거에 이겼으니 다시 도효 위에 오를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스모를 보다가 난데없이 나라 걱정이 들어 나는 심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