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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Dec 18. 2022

소크라테스의 죽음

파이돈과 함께

 


이 그림을 새롭게 만난 것은 알랭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에서다. 

책을 읽어가며 위안을 행복으로  바꿔 읽어도 무리없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앙랭드 보통은 행복이 단순한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닌 소유는 더욱 아닌,  

견딤과 함께 삶을 이끌어 가는 객관화 혹은 성찰 뒤의 행동 같은 거로 생각했다. 


그는 인기 없는 존재들을 위하여...라는 챕터에서

소크라테스를 소환하며 쟈크 루비 다비드의 그림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내 앞으로 가져왔다. 

테스형(소크라테스 쓰기가 힘들어서 여기부터 테스형)의 용기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힘이라고 했고 

그래서 죽음도 견디어 낸 것이라고,

죽음을 크지 않게 생각한다면 세상의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나를 즐겁게 하고 나를 생각하게 만드는 알랭드 보통과의 만남, 

그리고 그가 만난 테스형, 

나는 결국 깊은 밤 테스형의 죽음이 기록된 파이돈을  

경기도 사이버 도서관에에서 읽게 됐다.

테스형의 죽음에 내 죽음도 살짝 얹어 생각하며  

우리가 알던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하지 않았던 말인데 

우리는 그 말을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배웠다.

 파이돈은 테스형의 마지막 장면을 기록한 책인데 

테스형은 도망을 갈 수도 비굴하게만 굴면 살아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악법도 법이라 그것을 지키노라 죽은 게 아니라 테스형은 영혼을 믿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다.  

그는 죽음 뒤의 세상이 있다고 확신했고 죽음 뒤의 세상이 현실의 삶보다 나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더 좋은 사람들과 스승을 만나리라고 확신했다.   

  

다비드의 그림은 틀림없이 파이돈을 자세히 읽고 난 후에 그린 그림이 맞을 것이다. 

침대 발치 아래에 있는 쇠사슬은 죽음의 날이기에 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파이돈에서 나온다. 

테스형은 그 쇠사슬을 푸는 순간에도 철학을 한다. 

“쾌락이란 정말 묘한 것일세. 또 고통이라고 하면 으레 그 반대로 생각하지만, 

고통과 쾌락의 관계 역시 묘한 것일세. 

지금 경험해 보니 사슬에 묶여서 발이 아프다가 고통이 사라지니 쾌감이 뒤따르는 것 같네.”

 그리고 저 그림속 테스형의 아내 크산티페가

 아이들을 데리고 와있었는데 

파이돈을 비롯한 제자와 친구들이 들어서니 소리를 내서 통곡을 하니 

 테스형이 저 여자좀 내보내라고 말하는 대목도 있다.

악처라고 소문은 났지만 그래도 남편인 테스형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감옥 문을 나서는 모습.

그리고 담대한 테스형과 슬픔에 젖어 어쩔 줄 모르는 친구와 제자들,   

조금 이상한 것은 플라톤이다. 

파이돈을 쓴 플라톤은 플라톤이 병중이라 그 자리에 없었다고 기록을 한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플라톤을 다비드는 맨 앞자리에 그렸다. 

독약을 드는 테스형을 바로 보지 못하겠다는 듯 아예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플라톤.

기록하는지자 답게 그 곁에는 두루마리와 필기구가 떨어져 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할 때 플라톤의 나이는 약관 29세였다.

다비드는 그런 플라톤을 머리 하얀 늙은이로 묘사했다. 

그의 고통을 머리 세기로 표시한것일까, 

테스형 앞의 크리톤은 그의 무릎을 잡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떠날 시간이다

나는 죽기 위해 그대들은 살기 위해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 중에 어느 편이 더 나은 쪽으로 가게 될지는 저 신만이 알 것이다.”

 테스형은 죽음은 곧 육체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것이라고 보았고, 

진정한 철학자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파이돈에서도 영혼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질문과 비유와 대화로 이어진다.  

벗과 제자들은 슬픔에 빠져 있고 그런 그들을 설득하고 있는 담대한 테스형

생각하면서 보니 더 아름답다.  

 소크라테스의 움직임과 슬픔에 몸부림치고 있는 제자들의 움직임, 

그 대비가,

 우리네 인생을 나타내 주고 있지 않은가. 

좁은 감옥이지만 그곳엔 생과 사가 있고

빛과 어둠의 존재도 선명하게, 인물들의 모습을, 그들의 심리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테스형은 어떠한 대상들보다도 밝게 빛난다. 

그러니 작가는 죽음에 대한 인식으로 이렇게 삶이 갈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런 긴 이야기를 한 것일세. 육체의 쾌락이나 장식은 쓸모가 없으며,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이와 같은 생각을 물리치고 배움의 쾌락에 열중한 사람들은 영혼에 대한 확신과 기쁨으로 충만할 거라 말하고 싶네. 그리하여 이런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쓸모없는 것으로 장식하지 않고, 오직 영혼만을 위한 절제와 정의, 용기, 자유, 숭고함, 진리 등으로 단장한다네. 그리하여 때가 되면 떠나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걸세....파이돈 중”     


이게 어젯밤의 일이다. 

깊은 밤에 만나는 멋진 사람들, 

<문득문득> <자주자주> 늙어가는 <내 삶이 형편없이 여겨지는> 여윈 시간들에 

그들의 삶과 사유가 보글보글한 스웨터가 되어 감싸주는 것 같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보다 

속이 꽉 찬, 꽃 같은 노랑을 품고 있는 겨울 배추와의 만남같은,       

사람마다 얼굴 다르듯이 행복의 모습도 천차만별이다. 

내게 다가오는 삶속에서 찾아지는 작은 기쁨이 행복이라고 

어느 때 부턴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삶아서 끓인 배추 된장국을 먹을 때, 

알맞게 익은 김장김치의 맛에 놀랄 때, 

그리고 늦가을에 담은 아주 소박한 배추 백김치를 고구마와 함께 먹을 때,

(배추 이야기를 한 꼭지 써야겠다 ㅎ)

행복하다. 

너무 소소해서 객관성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수십만 원짜리 호텔 케익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음 괜찮아, 나는 이 백김치가 맛있어. 배추국도  좋아, 충분히 만족해.  

혹시 그대가 돈을 좋아한다면 그대는 여기쯤서 여우의 신포도를 떠올리겠지. 

진심이랑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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