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저녁,
지인의 초청으로 아람누리에 공연을 보러 갔다.
차로 가면 5분 정발산을 가로질러 걸어가면 삼십 분이면 닿는 음악당은 일산에 사는 기쁨을 주는 곳이다. 지나치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하이든 홀은 공명이 좋아 R석이나 S석 이층 자리도 별 차이가 없다. 콘서트가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는 전제를 하면 살짝 아쉬울 수도 있지만,
색소폰 오케스트라라니 좀 궁금하기도 했다. 원래 색소폰은 오케스트라에도 끼지 못하는 악기다. 후발주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리가 너무 커서 협연이 어려운 탓도 있다고, 맨 위의 타악기를 빼면 정말 다 색소폰이었다. 색소폰에 무지해서 소프라노 알토 베이스 테너 바리톤 소리를 구별해서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마추어들이 모여서 베르디의 개선행진곡과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그리고 2부에서는 차이콥스키의 심포니 4번 4악장을 연주했으니 대단했다.
특히 케니 지가 작곡한 ‘Going Home’을 상임 지휘자가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연주할 때 가슴 속의 불이 확 댕겨졌다. 나는 이층에 앉아 있었는데 놀라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객석에서 약간의 파동, 오, 세상에 관객석을 걸어 나오며 연주하는 지휘자. 몸도 자그마한 분이었는데 웬걸 에너지가 차고 넘쳤다. 흥겨운 캐럴을 연주할 때면 관객의 박수까지 유도하고 친절한 해설까지 겸했으니 경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 재롱도 없이 예배만 드렸는데 태너 윤정수의 ‘Turandot’의 아리아가 이어지고 캐럴 중에서 가장 내가 좋아하는 곡 ‘O Holy nIght’이 울려 퍼지니,
오 탱큐, 주님....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사재思齋 공원이 있다. 경로당이 있고 산수유나무 몇 그루와 소나무 아래 벤치가 있는 아주 작은 공원으로 걸을 때마다 그곳을 지나게 된다. 정발산에도 자그마한 연못에 다리를 담근 사재정이 있다.
사재는 조선 중기 학자 김정국의 호다. 그는 일찍 과거에 합격해서 청렴한 목민관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기묘사화로 인한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벼슬을 떠나게 되고 이곳 정발산 기슭에 살며 후학들을 지도하며 사람들과 교류를 했다. 그래서 사재라는 이름으로 공원과 사재정을 만들어 기념한 것,
그런 사재 김정국을 다시 보게 된 것은 그가 쓴 시를 읽고 나서다.
토란국과 보리밥은 배부르기에 넉넉하고/부들자리와 따스한 온돌은 누워 자기에 넉넉하고/퐁퐁 솟는 맑은 샘물은 마시기에 넉넉하고/서가에 가득한 책은 보기에 넉넉하고/봄꽃과 가을 달빛은 감상하기에 넉넉하고/새소리와 솔바람 소리는 듣기에 넉넉하고/눈 속의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는 향 맡기에 넉넉하고/이 일곱 가지 넉넉함을 즐기기에 넉넉하다
마지막 구절이 방점이다.
소박한 삶의 전형으로 누구나 다 즐길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넉넉하게 즐길 줄 아는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는 낙향 후 자신의 호를 팔여거사로 바꿨다고 한다.
사재공원과 사재정을 볼 때마다 일곱 가지 소유와 풍경을 생각하며 내 마음이 넉넉한가 생각하게 된다.
성경을 읽다가 홀리넷에 들어가 <복>을 검색해 봤다. 생각보다 복이 그렇게 많지 않다.
개역 개정에서는 스물세 단락이 나온다.
복이 기록된 장을 찾아서 다시 찬찬히 읽어본다.
빌어주는 복이 많다. 복 주시기를, 복 받을 자여,
선언의 복도 있다.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
그런데 신명기는 조금 다르다.
12장에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16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택하신 곳에서 절기를 지키면 소출과 손에 복을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 하라’
복을 아무리 풍성하게 주신다고 한들 그것을 즐길 수 없으면
그것이 복인 줄 누가 알겠는가,
오 그렇구나. 그래서 MARRY XㅡMAS!
새해가 밝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복을 넉넉하게 즐기실 수 있기를! (교계신문 연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