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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an 11. 2023

이런저런

딕존슨독락당산책

 십수 년 째 매달 한 번씩의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북클럽이 있다. 책을 정해서 읽고 토론을 하기도 하지만 어느 땐 그 책에 의해 파생된 삶의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눌 때도 있다. 누군가 우리 중 먼저 떠난 이가 있다면 무덤 앞에 가서 모임을 하자는 이야기도 했는데 서로가 이 모임을 그만큼 귀하게 여긴다는 표현이다. 그중 한 분의 아내가 암이라는 날개를 타고 하늘나라로 이사를 하신 것이 오육 년 되었을까, 오래 산 부부들이 그러하듯 특별히 애틋하거나 유별난 금슬을 자랑하는 사이는 아니었다(함께 오래 산 부부들은 거의 그러질 않던가) 그리고 재혼은 안 했지만, 전의 아내와는 너무도 다른 우렁각시 같은 여자친구가 생겨 살뜰한 챙김을 받고 있는데 이번 모임에 뜻밖의 고백을 했다. 아내를 기억하는 일이 하루 중 70~80%라는, 흘러가는 시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없다는 듯 너무 생각이 많이 난다는, 눈에 물기가 어려있었다. 설왕설래, 배우자를 잃는 것이 가장 큰 상처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각양의 다채로운 변증이 이어졌는데 나는 존재의 슬픔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사람에게는 근원적인 슬픔의 보따리가 내재 되어있고 가장 큰 상실이 그 보따리의 매듭을 풀었을 거라는, 슬픔은 사랑과 그리움에 기인하여 있을 거라는,

 <딕존슨이 죽었습니다> 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평생 다큐를 찍어온 감독이었던 딸이 86세의 정신과 의사였던 알츠하이이머가 진행되어 가는 아버지의 죽음?을 아버지를 출연시켜 카메라에 담는다. 다양한 죽음을 아버지에게 경험하게 하고 가상의 장례식도 치른다. 어느 때는 죽어서 천국엘 가는데 그곳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기도 하고 장애가 있어 평생 맨발을 내놓지 못했다던 그의 발은 정상적인 발가락으로 변하기도 한다. 서로를 너무도 사랑하는 두 부녀에게는 이별 연습이었을 것이고 나에게는 죽음에 대한 친근한 서사처럼 여겨졌다. 좋은 영화는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시간ㅡ죽음의 시간ㅡ들을 찍으면서 삶과 죽음의 차이가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초콜릿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은 쵸코렛이 정말 행복인가, 다시 보게 만들고(이상하게 나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이 때문에 정말 좋아하던 운전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짓던 슬픈 표정과 눈물 어린 모습은 어떤 서사보다 강렬했다. 죽음의 절대적인 아우라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경험할 수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다가오고야 마는 절체절명 한 공평이다. 헤어짐이라는 원소로 되어진 슬픔덩어리 죽음. 우리 모두 공평을 원하고 바라지만 공평은 또 얼마나 냉정하고 단호한가, 

 조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 1491년~1553)’은 경주 안강의 자옥산 기슭으로 낙향한 후,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인고(忍苦)의 세월을 외로움과 함께 버텨 냈다고 한다. 몇 년 전 경주에 갔을 때  옥산천에 있는 독락당을 찾아갔다. 나처럼 눈이 없는 사람도 아주 좋아 보이는 동네였다. 뒷산은 아늑하게 자리 잡고 동네를 품고 있었으며 이른 봄의 따스한 햇살은 아기 포대기처럼 동네를 감싸고 있었다. 가까이 있는 옥산서원을 둘러보고 마음을 씻어준다는 세심대도 바라보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던가,  독락은 혼자 즐긴다는 뜻으로 혼자서 충분히 즐길 수 있을거라는 바램이었을 것이다. 이언적은 담을 헐어낸 자리에 살창을 끼워 계곡의 물소리를 눈으로 들으면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도 사무치는 외로움은 다가왔을 것이다

내 목표는 독락당에 있는 중국 주엽나무를 보는 것이었는데 문은 닫혀 있었고 아무리 기웃거려도 주엽나무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어딘가에 무엇인가를 보러 가서 보지 못하는 것도 괜찮다고, 다음을 기약할 수도 있고 더욱 상상할 수 있으니, 옥산구곡이 펼쳐진다는 계곡 트래킹을 위해서도 한 번 더 가볼 요량이다. 


혼자서 하는 독서도 좋지만 혼자서 하는 산책은 더 좋다. 어제 오후 천천히 걸어서 정발산을 지나 호수공원 가는 길을 네 시간여 걸었다. 많은 이들이 보이고 내 곁을 스쳐지나갔지만 나는 혼자였다. 아직도 깊은 겨울, 아이들이 좋아하는 자그마한 둠벙은 얼어있고 나무들은 굳건하게 몸을 닫은 채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나무 우듬지를 보느라 고개를 높이 들었더니 햇살 때문에 눈이 깜박 거렸다. 그 때 아주 잠시 새순 피어오르는 사월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람에게 죽음이 깃들어 있듯이 지금 나무들은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몇 달만 있으면 다시 눈부신 생명의 환희가, 부활의 종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에서 읽었는데 의학용어로 所在識이 있다고 한다. 병원에서 환자의 의식 수준이 낮아질 때 아주 단순한 질문으로 이루어진 검사. 여기는 어디입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지금은 언제입니까? 그게 과연 단순한 질문일까? 소재식 검사를 나에게도 해본다. 여기는 어딘가? 당신은 누군가? 지금은 언제인가? 질문을 확장시키면 명징한 의식일수록 답은 어려워진다.  


              

삼일전 호수공원 어제는 눈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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