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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Mar 23. 2023

담장의 말

담벼락 방랑자 민병일 산문집




<꽃이 일어서고, 빛이 일어서고, 별이 일어서는 봄! 

그리운 것들이 일어서는 숨소리 들리는 3월에 

선생님의 입술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부르는 황홀한 시간 길어 올리세요. 

한 섬에서 마악 일어선 산들바람 선생님께 건너갑니다/ 민병일 >



섬에서 마악 일어선 산들바람이 내게로 왔다. 

내 생에 처음 불어온 바람이다. 

세상의 도리를 아는 깊은 시선으로 오래전 것들을 응시하니

거기 삶의 자락 한 겹이 살짝 열리는듯도 하다. 

그 바람은 봄의 아름다움을 품고 비의 적막을 지녔으며 

며칠 전 다녀온 모로코의 푸르른 하늘빛을 담고 있다. 

그곳의 하늘은 원시처럼 푸르르고 원시처럼 맑았다. 

우아한 겸손과 절제 있는 품위가 자주 출몰하는 바람이다. 

오렌지 꽃향기 같기도 하다. 

어쩌면 짙은 초록 숲이 펼쳐지기도 한다. 

사하라 사막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사막인들은 평생 초록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탑에는 거의 모두 초록색이 새겨져 있었다. 

왜 아니 그러랴, 

마악 일어선 산들바람이지만 

창세 전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시작된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는 와온 바다 햇빛을 수집하는 섬달천 마을 뒷간 담벼락에서

프랑스의 산속 구릉 위에 새겨진 르 코르뷔지에가 만든 롱상성당을 발견한다. 

아주 오래된 수도원의 빛(햇살)과

투박한 어부가 만든 뒷간으로 스미는 햇살(빛)을

병치하는 놀라운 상상력은 얼마나 기하학적이며 유쾌한가. 

아, 또 팔은 얼마나 길어야 그 둘을 품에 안을 수 있을까, 



전라도 순천의 와온해변은 나도 잘 아는 해변이다. 

이제 세상에 없는 내 언니가 무척 좋아하던 곳이다. 

그녀가 생전에 그랬다. 

“여기 황혼이 그렇게 아름답단다.”

우리는 그 해변을 두 번이나 스쳐 지나갔지만, 언니가 바라본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는 없었다. 

오늘도 내 딸과 나는 그녀를 이야기하다 둘 다 눈물을 흘렸다. 

왜 그녀는 그렇게 아팠고 일찍 세상을 떠났을까, 

혹 언니와 함께 그 아름다운 일몰을 바라보았다면 

이 저미는 마음을 와온해변의 풍경이 조금이라도 온순하게 만들어주었을까,



작가는 평사리에서 생면 부지의 한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대한다.

어찌나 거룩하던지 바로 밥을 먹을 수 없어서 

빨간 맨드라미 핀 장독대 앞의 밥상을 사진 찍은 후 밥을 먹는다.

그러니 그의 기도는 사진일 것이다.

벽에 걸린 조리, 구수한 가을 햇살을 받고 있던 조리 사진을 찍으려고

빛이 좀 더 차오르기를 기다리는데 그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는 도둑이어서 그렇게 가슴이 뛴다고 여긴다. 

피사체를 훔치는 일이고 보이지 않는 미를 훔치고 보이는 순간을 훔치고 

심연을 훔치고 은유를 훔치고 

그렇게 세계를 훔쳐 빛과 이미지의 동화를 만드는 도둑.

결정적 장면을 낚아챈 사진은 우연의 시학이라고도 했던가. 


심미적인 것은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불협화음으로부터 온다고도 했다. 

불협화음에 내재한 정신은 

끊임없이 아름다움의 껍질을 파괴하면서 나오려고 한다는 것, 

그는 한참 아름다운 수국을 묘사하다가 바로 곁의 마른 넝쿨 줄기에 주목한다. 

마침내 중력과 중력 사이에 길을 내는 그들을, 

(여기쯤에서 나는 이 책을 곁에 두고 가끔 펼쳐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작가는 아주 조금, 

풍경 보는 법을 이야기해준다. 

낯익은 것을 조금 낯설게 바라보기, 

그러면 그곳에 연민이나 동경, 탄식이나 두려움이 있을 거라고, 

와온, 쓸쓸함의 극한점들이 찍혀 온유해진 물빛을 사뿐히 걷게 될 거라고, 

사실 무수한 풍경을 보면서도 나는 풍경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 

아니 갈수록 풍경이 무엇인지 모르겠더라.

풍경을 볼 때면 오히려 풍경은 사라지고

풍경이 보이지 않을 때 오히려 생각 속에서 되어지는 풍경도 있으니....

풍경은 마치 신기루 같은 것인가, 



민병일 작가의 <담장의 말>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풍경이 길을 내어줄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 

내겐 그게 없어서 풍경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라는 것, 

연애를 부끄러워하는 시절이 있었다. 

연애를 남녀의 사이에만 생겨난다는 어린 식견 탓이기도 하고 보성 촌사람이라 그렇기도 하다. 

실제 표준 국어 대사전에 연애에 대해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여 사귐’이라고 해설되어 있다. 

다행히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의 해설은 좀 더 낫다. 

‘상대방을 서로 애틋하게 사랑하여 사귐’이라고 되어 있다. 

애틋함이 존재하니 적용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 



글은 외로움의 토로다. 

응시해 달라는 프로포즈.

그래서 <진짜> 글은 연애편지일 확률이 높다. 

흙과 돌과 숨으로 빚은 담의 미학에 대한 쓴 글. 

한 섬에서 마악 일어서 내게로 다가온 산들바람, 

그윽하고 지고지순한, 

담으로 은유 된, 

아름답고 깊은 

삶을 향한 

연애편지. 

<담장의 말>



                                                                    책의 사진을 찍었더니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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