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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May 21. 2024

철학




철학을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철학적 사고는커녕 온전한 철학서를 읽어낼 능력도 없는 사람이지만,

 가령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책을 들고 벼른 적이 여러번이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사르트르의 구토도 그렇고, 

더군다나 이제는 도서관에 가면 양을 살펴보는 시절이 되었다. 

두꺼운 책은 소설 빼고는 다 무섭다. 

그러니 칸트의 책은 이제 내 생전 읽을 수 없는 책일지도 모른다. 

철학의 근원적인 책들도 읽지 못하면서 철학을 좋아한다고? 

의문을 가져도 관심이 사랑이라면 나는 철학을 사랑한다. 

철학은 아주 섬세한 학문이면서도 

결국은 삶과 죽음에 대한 굵은 획 같은 학문이다. 

헤아릴 길 없는 몸속 핏줄이 생명을 이루듯 철학은 삶을 밀도 있게 살피는 학문이지만 

핏줄을 감싸고 있는 피부처럼 삶의 수많은 가닥을 정리하고 정돈해주는 학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철학에 ~대한 ~의한 ~적인 글을 즐겨 읽고 글보다는 쉬운 강의를 자주 듣는다. 

김삼환 서울대 철학 교수의 에세이를 읽었다. 

그는 최근에 철학 심포지엄에 다녀온 이야기를 적고 있었다. 

세계가 위기라는 것을 모두 절감하는데 그 해법이 없다는 것, 

위기에 대한 정치적 대응은 독재를 불러오기 쉽고 윤리적 대응은 담론에 빠져 상황이 악화할 뿐이라는 것, 

그래서 그는 그 심포지엄에서 유사 종교의 길 즉 바울의 믿음을 제시했다고 한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실제 저 성경 말씀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예표 해주고 있지만,

 철학자는 그 형식에 주목한다.

 미래가 오늘에 근거하고 과거에 형태를 부여하는 즉 미래중심의 구조라는 것. 

이미 많은 현대 철학가들도 바울의 믿음에 근거한 희망의 신학, 희망의 철학을 설파하고 있다고 한다. 

가령 해체주의 철학자인 쟈크 데리다의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역시 비 기독교인, 유물론적 사유. 신 없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메시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인 <믿음>이 희망으로 살짝 환치되어 인류의 위기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는 중일까, 

 

사람에게 착시Optical Illusion가 많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추석 무렵 두둥실 산그리메 위로 떠오르는 달은 엄청 크고 노랗다. 

그러나 하늘 위로 올라가면서 그 크기는 어느새 보통의 달이 되어 버리는 moon illusion. 

같은 길이지만 약간의 표시에 의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뮐러 라이어 착시, 

모나리자는 내가 어느 쪽에 서도 나만 바라보고 있다고 느끼는 모나리자 착시도 있다. 

착시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팩트처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다가오는 착시, 

이 착시가 빚어낸 느낌을 보완하기 위하여 다시 왜곡해서 집을 짓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의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은 직선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완만한 곡선으로 되어 있다는 것, 

배흘림기둥은 가운데가 둥그렇게 보이는 것이 멀리서 보면 오히려 반듯하게 보이는 효과를 낸다.

 착시는 결국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우리에게 인식시켜주는 

창조주의 유머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적이 있다.

철학의 시선은 인간을 향해서 존재한다. 

철학은 인간을 벗어난 존재인 신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런 철학이 바울의 방법을 주시하며 바울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차용한다? 

바울의 믿음은 그것을 이루어주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가능했기에 존재하는 것인데 

주님 없이도 믿음은 가능한가, 

주님 없는 믿음이 절체절명의 위기, 현대를 구원할 수 있을까? 

믿음과 희망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천사의 계단’이란 식물을 키운 적이 있다. 

이름도 예쁘고 햇빛을 잘 보면 핑크색으로 변하기도 하는 특이한 식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화분에 키우지만 대개의 관엽 식물이 그러하듯, 

아열대 나라에서는 야생에서 나무처럼 자라기도 한다. 

햇빛이 적은 건지 키가 웃자라기도 해서 물꽃이를 한 뒤 뿌리를 내려 개체 수도 늘렸다. 

어느 해봄 이파리가 점점 말라지기 시작하더니 초록색의 통통하던 줄기조차 색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니, 너 왜 이러니, 무심코 몸을 만졌는데 쑥 뽑혀 버린다. 

다 말라서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들어버린 뿌리들, 

줄기와 이파리는 그저 관성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 이미 오래전에 죽어있었다. 

문득 그 시들어버린 뿌리를 보며 나 사는 것도 혹시 이러지 않은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느 부분 죽어가는, 

살아 있지 않은, 

그러다가 또 생각해보니 사는 것 자체가 죽음의 여정일진대, 

이게 또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거침없이 화분에서 수욱숙 뽑히는 천사의 계단을 뽑다가 

나를 추수하시는 분에게로 생각이 저절로 향하던.... 

혹시 메시아 없는 믿음은 바로 그 뿌리없는 식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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