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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Sep 19. 2016

북두칠성이 서쪽을 가리키면

흰이슬 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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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 6년 10월 12일 밤이었다. 옷을 벗고 자려는데 달빛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기뻐서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함께 즐길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승천사로 가서 장회민을 찾았다. 

회민 또한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서로 함께 뜰 가운데를 거닐었다. 

뜰아래는 마치 빈 허공에 물이 잠겼는데,

물속에 물풀이 엇갈려 있는 것만 같았다. 

대나무와 잣나무의 그림자였다. 어느 날 밤이고 달이 없었으랴. 

어딘들 대나무와 잣나무가 없겠는가? 다만 우리 두 사람처럼 한가한 사람이 적었을 뿐이리라. 


(元?六年十月十二日夜, 解衣欲睡, 月色入戶, 欣然起行. 念無與樂者, 

遂至承天寺尋張懷民. 懷民亦未寢, 相與步於中庭. 庭下如積水空明, 水中藻荇交橫, 蓋竹柏影也. 何夜無月, 何處無竹柏, 但少閑人如吾兩人耳. 정민 역)

******



소동파의 「승천사의 밤 나들이(記承天寺夜遊)」란 글이다.

문득 글방의 별호가 서정 채록인데 

집 쥔은 과연 서정을 아는가 의문이 들었다.

핑계 같지만 우선 달빛 들어오는 창문이 내게는 없다. 

희뿌여한 가로등 빛이 달빛을 제치고 서서 잠들어 있는 나를 파수할 뿐이다.

하긴 세상 속에 너무 깊이 잠들어 있어 소삭거리는 달빛이 나를 어루만진다 한들 

깨어날 수나 있으랴, 

옅고 부드럽고 순후 한 것들이 무수히 내 곁을 스쳐 지나가도 

독해진 살갗은 미미한 열림도 떨림도 없다.

하다못해 죽음을 봐도 무덤덤하니 가까이 살던 외숙이 

돌아가신 지 두어 달 지났어도 

아짐 슬퍼? 외숙 안 계시니? 

그런 가벼운 질문 속으로 외숙의 사라짐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표로 삼고 있을 뿐이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에 대해 한 꼭지 쓰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만

똑똑하고 명석한 외갓집 식구들과는 다르게, 

태어날 때부터 짜잔(?)하게 태어나 

외할머니와 고아원 원장 어머니와의 합작으로 

겨우겨우 고아 아내를 얻었고

그 아내 덕에 평생을 산 사람, 

나 아주 어렸을 때 아주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이면 

우리 집 합수(재래식 화장실의 내용물을 이른 전라도 마르 여러 갈래의 물이 합해져서 흐르는 합수를 거시기에 사용하는 유모어, 혹은 그럴듯한 폼이 엿보이는 말이다. 아니면 거름으로 사용하는 거시기에 대한 공칭이었을까?)를 퍼주었던 분, 

언제나 그저 남의 말에 

그렇제, 그렇제,

평생 긍정만 하고 살아오신 분, 

그렇다고 아주 순박하고 좋은 사람도 아니어서 치매 걸린 외할머니에게 했던 행동을 들으면, 

사람이 부족하면 그럴까? 정말 콱~! 몽둥이로 때려, 라도 주고 싶은, 

오죽하면 울 엄마, 

네가 사람이냐, 잉 사람이여? 하셨을까? 

그래서였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의 죽음에 무감각했다. 

무엇인가를 적어낼 수가 없었다. 

적다, 라는 속에는 기억할만한 혹은 아름답지 않더라도 진득한, 무형의 적막함이거나, 구슬땀, 슬픔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쁨은 서정의 한 부표일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만물 속에 격이 자리하고 있듯이 기쁨에도 역시 격이 존재한다.

소유로 비롯된 기쁨은 저급의 기쁨이요 

성취로 생겨나는 기쁨이 중급이라면 

자연에서 얻어지는 소소한 기쁨이야말로 고급한 기쁨일 것이다. 

그러니 달빛을 보고 기뻐하는 소동파 그이야 말로 

서정의 접점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서정의 속성은 부지런함이다. 

아무리 아련한 달빛이 들어온다 한들, 

잠자리에 그냥 누워있으면 달빛 대신 잠이 들이찬다. 

서정과 함께 하려면 피곤한 몸일지라도 

아주 깊은 시간이라도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방문을 열고 달빛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그 달빛 아래 뒷짐을 지고 서성거릴 수 있어야 한다. 

계절이 가는 소리를 들어야겠지,

혹시 계절이 오는 소리가 들릴지도 몰라. 

거칠고 사악한 관계나 손익으로 가득한 마음속 

달빛으로 씻어내며 

아니 달빛으로 몰아내며 그저 마음속에 환한 달빛만 그득해질 때까지 그는 서성였을 것이다. 

달빛으로 충일한 마음속에 문득 이 달빛을 같이하고 싶은 벗이 그리워진다.

그는 달빛처럼 휘적휘적 걸어 벗이 있는 곳에 다다른다.

벗 역시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다. 

혼자 걷던 달빛 아래 벗과 같이 걸으니 달빛은 더욱 환해진다. 

혼자 품던 달빛을 벗과 같이 품으니 저절로 시심이 그득해진다. 

혼자 있을 때는 그저 달빛이더니 

벗과 같이 하니 

달빛이 물이 되어 온 뜰을 가득히 적신다.

대나무와 잣나무는 물풀이 되어 오히려 더 고요하다. 

벗과 나도 물속의 선인이 된다.

어딘들 달 있고 어딘들 대나무 잣나무 있지만

뜰아래 가득히 빈 허공에 물이 차오르고 

그 투명한 물빛 속을 거니는 그와 그의 벗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그는 한가한 사람閑人如이라고 적었지만 그의 한가함은 서정이다.

서정은 

삶을 여유 있게 살아가는 자만이 바라볼 수 있는, 

누릴 수 있는, 

삶이 숨겨놓은 보물이거나 선물일 것이다. 


흰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時이다. 

하늘의 북두칠성이 서쪽을 가리키면 푸른 풀잎 위에 흰 이슬 맺히는데

별빛 흐리고 

흐린 별빛 핑계 삼아 별을 바라보지 않은지 오래니

오늘 밤이라도 

하늘 위의 국자 북두칠성이라도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바라보면서

서쪽은 어디인가, 

겨울이 어디에서 오는가, 

궁구 하며 

서성이다

풀잎 위에 맺힌 이슬에

발을 젖게 하는 

가을맞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면 

혹 

내 삶 조촐해져 초가 누옥의 이름에 조금이라도 걸맞아 지려는가,




서호에 있는 소동파 상...동파~~~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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