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영 Dec 21. 2016

침묵의 책

세라 메이플런드

‘롯데 콘서트홀에서  KBS 교향악단의 베토벤을 들었다. 그것도 9번을,

베토벤이 창조한 아름답고 화려한, 거대하면서도 섬세한,

사람이 만든, 신의 세계. 

현들과 관악기 그리고 북소리....와 백 명이 넘는 사람의 소리가 합하여 

그들의 무한 실체들이 결합하여 전혀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강림하셨다.   

음악은 사라지면서 존재하는 기이한 세계다.

절대적 침묵을 배경으로만이 존재하는 전제국가,  

나를 비우고 나의 침묵 속에서만 현현하는 이 소리의 향연은

침묵과 고독에 의해서만 도래한다는 아주 새로운 전제를 지니고 있다. 

수많은 음들의 강림 속에서  침묵은 완강하고 깊다. 

침묵 속에서 열리는 새로운 세계, 


침묵은 고요가 아니다.

말의 반대나 소란스러움의 반대도 아니다. 

침묵은 결핍도 아니고 관계의 소멸은 더더욱 아니다. 

침묵은 아주 독특한  아주 깊은 오직 침묵만이 자리할 수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그만의 세계다.

침묵의 길 중에 가장 뚜렷한것은  자신의 내면으로 뻗어있는  길이다.

어쩌면 음악이 그러하듯이 

모든 예술과 혹은 모든 존재도 그런 침묵을 전제로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북한산을 다니면서 꿈꾸게 되는  나만의 꿈 하나,. 

달빛 환한 날 산봉우리...사모바위든지 의상봉이든지 백운대 그 어디라도 좋으니 

북한산...그 어디 꼭대기에서 깊은 밤 휘영한 달과 대면하고 싶은 것, 

적막한 어둠뿐인 세상에서오직 어둠속에서 나 홀로 있고 싶은 욕망.

나의 이 꿈이 기실은 온전한 침묵을 그리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침묵의 책>을 읽을 때서야 알았다.     


가끔은 새 책이...

전혀 모르는 작가이고 몰랐던 제목이라 할지라도 

서가 앞에서 만날 때 강렬한 인력을 느낄 때가 있다. 

책의 띠지와 겉싸개를 벗어버린 민낯의 책

표지는 가볍고 그저 하얗고 제목은 조그마하게 세로 면에 쓰여 있다. 

세라 메이플런드....처음 듣는 작가의 <침묵의 책>

첫 챕터를 읽어가며 흠~~ 책의 향기를 맡는 신음소리가...저절로 나온다.     

참고로 나는 이 책의 첫 챕터를 읽은 후 여기저기 소제목을 찾아가며  내키는 대로 읽었고 다시 또 제목을 찾아 두 번 째 읽었다. 두 번 째 읽을 때는 물론 성기게 읽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새로운 글, 새로운 장면, 새로운 사색이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러니 도서관에서 이주...를 빌리는 동안 

거의 날마다 이 책의 여기저기를 읽었다는 결론이 된다.

가끔 독서를 하는 중에 독서와는 아주 별의 되는 난데없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문득 책을 읽는다는 것은 욕망이 배제된 사람의 몸을 탐하는 일과도 비슷할까, 

내 아이들.,., 

이제는 내 아이가 아니라 저들 자신이 되어 있지만 

저들이 저들이 되지 못하던 시절 온전히 나의 돌봄으로 저들이 존재하던 시절....

그 사랑스럽던 몸뚱이들,..,,을 보고 만지며 씻기던 시절....이 기억났다. 

침묵의 책을 마치 내 아이들 몸을 샅샅이 살피듯 여기저기 들쑤시며 읽어 제친다.  

얼핏 예의 없어 보이는 이 탐욕스러운 독서법은 오직 이 텍스트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글을 잘 쓸 수가 있지? 

마치 세라 메이플런드는 아주 오랜 시간 수련해온 뜨개질 장인이 옷을 뜨듯 능숙하게 글을 엮어간다다

유장하며 촘촘하게 엮어가다가 다른 색실을 섞는데 그 변화와 깊이가 놀랍다.  

그녀는 침묵을 찾아 나선다. 그녀의 침묵은 홀로나서지만 홀로가 ㅡ 아니다.

그 자신만의 침묵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하는 침묵이었다.

그러니까 자연 ,,,

사람이 발걸음이 없는 자연만의, 자연인, 날것 그대로의 침묵을 지니고 있는 그런 장소여야 한다.

 그녀는 아주 오래된 빈집,  근방에 거의 사람의 자취가 없는 황량한 곳에서  40여일을 보냈고

다시 또 더 날카로운 빈터를 찾아 나서 집을 짓고 그곳에서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 지닌 채 살기도 한다.

더 깊은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사막에서 거하기도 하고 알프스 산자락으로 떠나기도 한다. 

자신이 경험한것 같은 지역이나 상상가능한 곳을 그녀는 택하지 않았다.

오직 황량 해야 하며 황무한 들판, 황막한 계곡 속으로 그녀는 들어선다.

생경한 자연처럼 에서 전혀 다른 침묵들이 찾아든다.  

자연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의 침묵들

그 무엇도 가능하지 않는 완벽한 침묵을 찾아 스코틀랜드 남서쪽으로 떠난다. .      

산비탈의 침묵과 사막에서의 침묵은 매우 다르다.

 "산위의 침묵은 절대 고요하지 않다. 바람은 쉴 새 없이 불어와 마치 첼리스트의 활처럼 만물로부터 놀랍도록 풍부한 음을 뽑아낸다.(섬세한 관찰력과 멋진 비유에 아름다운 표현이다)”  

어느날 그 산의 정상에서 아무도 없는 상태 속에서 진정한 침묵의 시간을 만난다.

그런 침묵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그 글을 읽는 바로 그순간 소스라치게 깨달았다. 

내가 북한산에서 봉우리에서 깊은 밤에서...만나고자 한 것이  

바로 세라 메이플런 그녀가 조우했던 진정한 침묵이라는 것을,

그녀가 야생의 장소에서 침묵의 시간을 찾아 헤매는것처럼 

나도  내 안에서 나만의 침묵을 찾아 헤맨다는 것을,

빈들판을 만날 때  

사람 없는 숲속에 들어설 때 

아무도 없는 호젓한 길가에서....

귀가 예민해지고 사람의 근원에 대한 막역한....깨달음......

고요가 이루어내는 합창 속에 들어서면 생이 지닌 근원적인 외로움이 터치되는....

그런 침묵의 시간을  생각한다는 것을, 

그녀처럼 야생의 자연이 지닌 사람의 발길이 닿지않는 순수한곳을 찾아 헤멘다는 것을 

 나도 그녀처럼  생의 근원적인 침묵을 사무치게 그리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든 침묵,

하다못해 오케스트라가 뿜어내는 그 무시무시한 음들도

결국은 침묵을 배경으로 탄생한다. 

그녀는 이런 침묵들과 만나면서 침묵이 지닌...침묵만의 세계로 역사를 헤아리기 시작한다.

자연속의 깊은 고독과 침묵은 모든 사람들 특히 예술가들에게 사회적 관습을 떠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그리하여 자기 내면의 깊은 곳 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는 것

은둔자들은 침묵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반면 낭만주의자들은 고독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이 둘의 미묘한 차이도 세라 메이필드는 아름다이 그려낸다.

그녀는 고독한 산책이 기억력을 증진시키는 창조의 샘이라는것도 깨닫게 된다. 

단순한 페르조나가 아닌 참된 내적 자아와  진실한 자아를 발견해내는...


하루는 차를 산위에 두고 잠을 자다가 그녀는 별이 부르는 소리에 잠이 깬다.

(아, 나도 그런 밤을 맞이할 수 있기를)

그리고 살아있는 하늘에서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엄청난 별들의 침묵을 느끼게 된다. 

별은 높은 온도로 타오르고 태어나고 다시 죽지만 

대기라는 담요를 벗어던지 우주는 고요하다. 

그녀는 은하계의 별의 수와 우리 몸속 세포수가 같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어디에선가 

사람의 감정의 갈래가 우리 몸속의 수많은 혈관의 수와 같을 거라고 글을 쓴 적이 있다. ,,

이 전혀 다른 두 방향의 이야기를 나는 침묵속에서 같이 읽었다.     

모든 독서는 침묵 속에서 진행되는  홀로 여행이다. 

<침묵의 책>은 참으로 정직한 제목이다.

수많은 이야기가 은유와 비유로 혹은 직접적인 아름다운 표현으로 채색되어 있는 

침묵이라는 그림....

침묵의 시간이 없다면 독서도 음악도 그리고 그림도 없다.

세라 메이플드의 침묵의 책에서 

나는 침묵이라는 전혀 새로운 예술 장르를 만났다.         

작가의 이전글 12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