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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Dec 20. 2016

12월

숲에서


겨울  새벽하늘은 그 어느 계절보다  맑다. 

맑음은 색의 종류나 형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물의 맑음처럼 어두운 밤하늘에도 맑음 있다.   
연초록 신록도 

장렬한 노을의 붉음도 

눈부시게 맑을수 있다는 것이다. 

초겨울 쌀쌀해서 더욱 멀어 보이는 하늘은 

짙으면서도 어두운 남빛이다.
남빛이라 칭해 보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겨울 하늘의 빛은  땅위에는 없다.  
 

형용키 어려운  신비한 하늘빛을  배경으로 별이 빛난다. 
저 빛나는 별은 은빛인가, 금빛인가, 흰빛인가, 
빛남의 존재를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별이 아득하다는 것도 생각지 말자.
별이 나와의 조우를 위해 생각하기도 힘든 시간을 달려왔다는 것도 잊자.
별이 지구처럼 혹은 지구보다 더 크다는 것도 접어 버리자.
성냥팔이 소녀의 

불꽃같은 별이 작게 사랑스럽게 반짝이는 것만 생각하자.
 

12월 - 하늘빛은 가장 신비스럽고 

별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시간들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모습을 수도 없이 반복해 그렸다는 모네라면 
저 하늘의 빛과 별의 빛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모네는 빛의 효과를 연구해서 그림에 옮긴 사람이다.
그는 어느 여름날 아주 뜨거운 햇볕이 내리 비치는데도 
검은 색 정장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그림을 그렸다.
모델을 서던 클로드가 물었다. 

이 더운 여름날 왜 그래요?
모네가 대답했다. 

밝은 색 옷을 입으면 캔버스에 빛이 반사되어 안 돼. 
 

모네 이전의 화가들은 실내에 앉아서 풍경을 그리며 
그 풍경 속에서 자신의 사유를 담아냈다. 
그러나 모네는 자연을 혹은 대상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리길 즐겨했다.
나뭇잎의 아름다운 색깔을 그리기 위해서 그는 줄곧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가 원하는 색채가 되는 순간을, 
어느 땐가 그는 여러 개의 캔버스를 놓고 한 장면을  줄곧 그리기도 했다.
같은 곳 같은 건물이지만 그의 그림은 빛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되곤 했다.
 

그가 아주 사랑하고 열심히 가꾸던 정원에 그는 꿈꾸던 일본식 다리를 세웠다. 
도록에서 그 다리를 찍은 네 개의 사진을 본적이 있었는데  
처음 아주 선명하게 그려진 
다리는 그의 그림 속에서 점점 다리의 형체를 잃어가는 대신 
정원과 하나 되어 갔다.     

마지막 네 번째 그림에서 다리는 숲과 하나 되어 
마치 둥그렇게 휘어진 나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진지하게 사물을 응시하는 자세로 그림을 그렸던 그가

실제 그리고 싶어 한 것은 
붓질 몇 번으로 형체가 나타나는 

분위기와 인상이었으니
생경스러우면서 도타운 이야기가 아닐찌, . 

싸아한 숲의 향기와 함께 어우러진 차가운 바람이 
여기는 저잣거리가 아니라고 속삭인다. 
 

겨울 숲은 공평하다. 

옷 벗은 나무도  

낙엽 이불 덮은 땅도 모두 비슷해 보인다. 
늘 푸른 나무 몇 그루 제외하면 

모두 가볍고 적나라하게  다 벗은 몸으로 
홀홀히 서있다.  

이파리로 꽃으로 엽엽이 치장하고 과시하면서 
서로 다르고자 애쓰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나무들은 겨울 앞에서 단순하고 고요하다. 

그렇다고 겨울 숲이 적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신나무 목피의 도톰한 괭이는 겨울이라 더 선명하고 
황벽나무의 검은 열매는 아직도 탱글거린다. 
낙상홍의 저 붉은 열매는 작은 여자도 
혹은 다아 낡은 옷을 입고 있는 여인도 
얼마든지 어여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좀 작살나무의 열매는 진보랏빛과 흰빛이다. 
그 조그마한 열매들은  모두 떠나버린 황량한 빈집에서 홀로 씩씩하다. 
이제는 늙고 시들은,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했던 가지에 
젊음의 생기를 불어 넣으면서 
겨울 숲에서 부모와 공존하고 있는 속깊은 효자이다.

더불어 황량한 숲을 찾는 사람들과 눈빛을 마주하는  
몇 안되는 색채의 숲 지킴이이다

옛날 부잣집에 있던 깊은 우물처럼 
기름진 산자락에는 조그마한 실개천 흐르고 
그 실개천 모여 자그마한 연못을 이루어낸다.  
숲의 거울인 연못은 여름 내내 싱싱한 나무들을 비추어내다가 
이렇게 겨울이면 다시 지는 나뭇잎 몸 위에 품고 있다가 
겨울 깊어 가면 가만히 몸안에 담는다. 
가물면 몸 풀어내어 나무들 살리고 
넘치면 물 가득 안으며 저쪽으로 저쪽으로 비키라니깐 
손 사래질 하는 숲의 어미이다.   

나무라고 사람과 다르랴. 
부모 그늘 평생 간다는 속설처럼 
늘 푸른 나무도 잘 태어나면 그 평생이 기름지다. 
나무의 뿌리를 살펴보면 그 자라온 환경이 보인다. 
여전히 땅속에서도 죽고 삼을 반복하고 있을 나무의 뿌리지만 
험난한 木生이 아니면 자신의 뿌리를 결단코 들어내지 않는다. 
있어야할 장소에 있는 것, 
사람의 격만이 아니다. 

나무의 격도 마찬가지이다. 

몸처럼 뿌리를 세상에 환히 들어낸 채 

그래도 굳건하게 살아가는 나무들도 거룩하지만 

뿌리를 들어내지 않아도 되는 나무의 생도 안온해 보인다  

뿐이랴.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의 지나가버린 영화 속에 젖어 사는  것처럼 
흘러가버린 젊음을 하얀 백발의 몸이 되어서도 꿈꾸며 살아가는 나무도 있다. 

산수국은 본래 꽃의 모양이 볼품없어 벌과 나비가 날아들지 않자 
살기 위한 존재의 방법으로 꽃도 아니면서 
꽃인 척하는 화려한 헛꽃을 피워낸다.  
그 헛꽃의 잔영이 그득한  산수국의 노쇄함 앞에서 한참 서성거린다. 
헛꽃조차 여전히 한 몸이다.  
헛꽃만으로 안되는 애?음이 있었겠구나. 
주인이면서 주인이라는 말 한마디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세월도 신산스러웠겠지. 

낙엽 겹겹이 쌓인 길은 포근하고 부드럽다. 
어디든 얼마든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자그마한 길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나무들의 대화는 바람이 전달해준다. 
여기저기 나무들 이야기를 담고 있는 
숲의 바람소리는 품격이 다르다. 
굳이 비유해보자면 숲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로맨스요 
저잣거리의 바람소리는 스캔들이라고나 할까, 

겨울 

황량한 겨울숲에서 황량한 인생길의 로망을 읽어낸다.
겨울숲  

그날, 

산의 초입에서 분명 눈 한 두어 개 나풀거리며 내렸었다. 
그래서 겨울숲은 더욱 깊었는지도 모른다.  
모네가 매순간 맹인이 처음 눈을 뜨는 것처럼 바라보았다던 빛의 마술은 없었지만
실존을 앞에 한 채 그리는 그의 그림이 인상이었다면 
나도 겨울 숲의 인상에 푹 젖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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