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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Dec 16. 2016

나, 다니엘  블레이크

생리대 복지



사람의 감정을 향하지만 그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서 어떤 장치도 하지 않는다. 

영화나 소설 즉 스토리라인을 지닌 것들이 유념해야 할 사안이다. 

감정은 그 다양한 것들을 보며 아우르며 조합해내며 무엇보다 조화롭게 수용하며 

각자의 마음속에서  저절로 생성되는 물질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끔 노래 부르는 프로를 보곤 하는데 누군가가 눈물을 흘렸다고 치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사람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감정이라는 것은 정말 퍼스낼리티니까,

그런데 그런 눈물을 화면에 잡는다.

이 사람은 우는데 너는 뭐하는 거니? 

다른 사람이 이정도면 너는 울지는 못하더라도 감격정도는 해줘야지? 

종용하는, 아주 천박한 프로선전이다. 

음악조차 최소한의 장치이상으로 사용하지 않는 정직한 감독도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켄 로치 감독, 

이름만으로 신뢰감을 주는 이름만으로 영화를 보고 싶게 하는, 감독이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그냥반이 은퇴를 번복하면서 다시 만든 영화라 했다. 

좌로 치우쳤다고....?

우로 치우친 사람들은 더 봐야하며 죄로 치우친 사람들도 보면서 밸런스를 잡아야 한다.

좌나 우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생각하게 하니까,   

이 영화는 매우 간결하다. 더군다나 사람의 흥미를 끌만한 주인공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흥미는 상당히 천박한 기류를 안고 있기도 하다, 로맨틱한 사랑. 즉흥적인 감정, 그리고 사랑에 대한 유희 등은 절절한 삶의 저항 앞에서 얼마나 가벼운 건지...)  

  

연금도 없이 복지만 기대하는 늙은 할아버지와 아이 둘을 데리고 사는 미혼모...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사회복지의 문제점들,

케이트는 철없던 시절 아이 둘을 낳게 되었지만 

아이들을 책임지려는 모성 가득한 젊은 여인이다. 

너무 배가 고파서 무료로 음식물을 나눠주는 곳에서 캔을 뜯어 먹고.... 

댄은 그런 케이트를 네 잘못이 아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라며 진심어린 위로를 준다. 

케이트는 결국 가난이라는 옹벽 앞에서 절망하다가 딸이 학교에서 떨어진 신발 때문에 놀림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몸을 파는 곳에 가게 된다.

그곳을 찾아간 댄, 그들이 울 때 나도 함께  울었다.

목수일로 평생을 살아온 댄은 컴맹이다. 

컴퓨터라는 이 물체가 댄에게는 도무지 알길 없는 존재다.

복지부 소속 한 사람이 댄에게 친절을 베풀어 컴을 지도해준다.

상관이 불러 그런 관례를 만들면...하며 나무란다.  

그가 처한 컴퓨터라는 벽, 복지라는 벽, 인간적 상황을 도무지 고려하지 않는 시스템이라는 벽 앞에서

댄은 결국 절망이라는 늪에 빠지게 된다.

케이트의 어린 딸이 그의 집 문을 두들기며 말한다

우릴 도와 주셨잖아요. 우리도 도와드리고 싶어요. 

결국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복지나 시스템이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 라는 것을 감독은 이야기 했을 것이다. 


생리대 대신 신발 깔창을 이용한다는.... 

한 달 만 원 가량의 생리대 값이 없는 어린 소년들이 우리나라에 십만 명가량 된다고 한다. 

부랴부랴 탁상 행정이라고 내놓은 게 보건소에 와서 이메일 적고 타가라는 것,

정말 가난이 힘에 겨워서 그러나 방세까지 정리한 채 세상을 떠난 세 모녀도  생각났다. 

그들에게 복지의 문턱이 낮았더라면, 

복지 시스템이 부드럽고 따뜻했더라면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일은 없지 않았을까, 

초등학교를 보내는 임대주택의 부모들은 

가장 두려운 것이 아이들끼리의 시선이라고 한다.

어디 사니? 몇 평 이니? 

임대주택이라고 하면 거기 사는 아이들과 놀지 말라는 서슴없이 말하는 부모의 언행은

인간의 존엄을 잃게 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다른 아이들을 가치 없게 만드는 순간 

자신보다 더 가진 자 앞에서 

자신의 아이들도 가치 없어진다는 것을 왜 모르는 것일까, 

어쩌면 정말 가난해서 부모의 방치 속에 크는 아이들이 

부모의 케어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과 차이가 날수는 있다

그러나 그 소수의 차이가 다수론 으로 변해서도 안 될 것이고 

그 소소한 차이가  인간에 대한 차별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돈이 민주를 박살내고 돈이 흡혈귀가 되어 피 대신 인간성을 소명시키는 것을 

지금 우리 정권은 화려한 파노라마처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권력이라는 너울을 뒤집어 쓴  한 여자아이를 위해 수백억을 책정하는 재벌과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높은 자리에서 

사람을 가르친 교수들이 그저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나 아닌 남을 지칭하는 

그  유려한 언변들,.,,,,을 보며   

절망하게 된다.       


이런 시대에 인간 존엄이라니....

돈이 가치이고 신이며 돈이 인격이기도 하는 이 맘몬이즘의 시대에....

기실 나는 귀신보다 맘몬이즘이 더 두렵다.

 

어디

I, Daniel Blake. 라고 외치는 사람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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