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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an 03. 2017

산책

정선 아우라지




산책은 천천히 걷는 일을 뜻하는데 묘하게 산책의 산散은 흩을. 흩어질 산이다. 

마음 길 가는 대로 쓰는 글인 산문도 그렇다. 

산책과 비슷한 산보도 한문 뜻대로 한다면 걸음을 흐트러뜨리는 것이다.

설마 흩어지는 것이 걸음일까, 

그러니 느슨한 걸음 속에서 생각을 흩어지게 하는 것이 산책이라는 거겠지.   

생각해보니 산책은 아주 미묘한 행위 같기도 하다.

걷되 나를 지배하는 것은 걸음이 아니라 생각이다. 

빈 방에서 하는 생각은 그저 생각 속에 머물지만 

산책 속의 생각은 나를 벗어나 저만의 존재로 나와 걷는 것 같기도 하다.

내밀한 생각이라는 존재가 몸 밖으로 표출되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산책은,   

가끔 동네 트랙을 걷긴 하지만 그것은 운동이지 산책이 아니다.

길게 산속을 걷기도 하지만 봉우리라는 목표가 있어선지 산책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점진적인 시력상실은 비극적인 일이 아니니까, 

그것은 마치 천천히 여름밤이 오는 것과도 같지 ‘

보르헤스는 실제 시력을 상실했다. 

그러니 자신의 경험이기도 한 이 아름다운 문장은 

아마도 그가 흐릿한 눈을 들어 산책을 할 때 살며시 다가온 게 아니었을까,

        

나는 정말 눈이 그리웠다. 

적어도 이 근래 사오 년 우리 동네는 눈다운 눈이 내리지 않았다.

건조한 손에 로션이 필요하듯이 내 마음은 눈이라는 습기가 필요했다.

나는 눈과 비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을 위해서만 내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섭리 중의 한 갈래... 인 그들은 

사람의 정서에 균형을 주는 매우 조화로운 물질이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는 아주 필수 불가결한 요소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은 사람의 감정을 갈하게 한다. 

논바닥 가뭄에 갈라지듯이 감정의 갈래에 먼지가 폴폴 날린다. 

강원도에 눈이 온다고 했다. 

레츠고 레일에 들어가서 아우라지행 왕복표를 예매했다. 

물 두 줄기가 만나 양평에서는 두물머리나 양수리가 되는데 

정선에서는 두 물줄기가 하도 잘 어우러져 아우라지라고 했다고 했다.

그 자그마한 물가에 서있던 젊은 여인도 보고 싶었다.  


사람 적은 기차 안은 아늑하고 따뜻했다.

앞뒤 등받이도 넉넉해서 다른 사람들 시선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유리창 문은 시원하게 넓었고 알맞은 기차의 흔들거림은 유쾌했다. 

서울을 벗어나자 눈발이 가볍게 흩날리기 시작했고 

이미 전날 내린 눈으로 산과 들판은 하얗게 변해있었다.

흰 눈이  이렇게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킨다는 것을.....그 단순한 사실,

익히 아는 이야기가 새삼 체화되는 순간이었다. 

눈이 덮인 시골마을은 그대로 카드 속 동화의 나라가 되어 

금방이라도 하늘 어디선가 순록이 마차를 끌고 나타날 것 같았다.

설산은 마치 들쑥날쑥한 나무의 우듬지들을 다정한 손님이라도 되듯이 포근히 껴안고 있다. 

<순백>은 순결하고 고독해서 범접치 못할 고고함을 품고 있다. 

<흼>의 아름다움은 숭고하기까지 해서 무릎 꿇고 경배하고 싶었다. 

기차가 오르막길을 숨 가쁘게 오르더니 산이 가까이 다가왔다.

차가 다니는 길은 아주 저 아래로 내려앉아 마치 알프스 협곡처럼 느껴졌다.

처음 알프스를 여행하던 극단적인 사람들은 마차에 커튼을 내리고 올라갔다고 했다.

그 거침없이 기묘한 높은 산의 정경이 

사람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 자못 광폭했기 때문에....   

화려한 봄 꽃 산에 내려앉을 때가 어린 여자의 미숙한 아름다움이라면

흰 눈은 우아하고 정결한 여신의 강림이었다.

그러다가 민둥산이 나타났다.

나무 없이 억새밭이던 평평한 봉우리 자락들..... 위에 흰 눈이 내려 

그가 지닌 곡선들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순식간에 사라진 민둥산의 정경이 마치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황홀한 잔상으로 남았다. 

가라 산이여... 흐르라 산이여 

여기 내 안에 그대 이미 존재해 있으니....    


정선에는 높은 산 위에만 눈이 쌓여있었다. 

여전히 눈은 쉼 없이 내렸지만 땅위에 내려 앉기도 전 사라져 버리곤 했다. 

정선이 지대가 낮은 곳이라는 걸 내 어찌 알았으리.....    

아우라지 강가

눈 덮인 강가에 서고 싶었는데.... 

야트막한 강줄기가 야트막한 산줄기 옆을 모른 체  걸어오다가 만난다. 

두 물이 합쳐지는 곳,

그 소박한 풍경에 무슨 흔들 다리를 놓아두고

무슨 그믐달 조각을 건 다리를 만든 건지,

그냥 그대로 두거나 가만히 있으면 불안한 현대인의 제 증상이 아우라지 강가에도 여실했다. 


풍경을 찾아내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소박한 곳 소소한 곳  어찌 보면 초라할 수도 있는 그저 그대로인...  자연에서 

역사를 느끼고 나만의 서정을 찾아내는 것이 여행인 것이다. 

다리는 이곳저곳을 이으며 대신 자연과의 교감을 끊어버리는 상징물.....로 보였다.

강가의 처녀는 어깨를 펴고 약간 고개를 든 채 

먼데를 분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이든 충분히 견뎌내고야 말... 강인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다시 정선으로 버스를 타고 나와 여기저기를 산책했다. 

정선장터에 들러 콧등 치기 국수를 사 먹은 것 외에는 혼자 네 시간 정도를 걸었는데

눈 나풀거리는 거리에는 거의 나 혼자였다.            

기억에 남을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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