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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Jan 06. 2017

길 위에서

강화





강화에 들어서면 왠지 마음이 고요해진다. 
마치 누군가가 뭉근 방망이로 날 선 마음을 
부드럽게 무두질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강화의 키 작은 집들 탓인지도 모른다. 
야트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나지막이 자리하고 있는 오래된 집들, 
자그마한 텃밭 사이로 서있는 뒤 안의 고만고만한 감나무, 
지붕 위로 고개 내민 붉은 감들은 지나가는 사람들과 무연한 눈길을 마주한다. 
넓은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무시로 흔들어도 무안하지 않게 받아주는 대문. 
개나리 줄기나 조그마한 편백나무 몇 그루로 표시된 담장들. 

섬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넓은 들판이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비어있어 더 넓어 보인다. 
빈 공간은 여여해서 아무나 주인이 될 수 있다. 
하늘이 주인인가 하면 스치듯 불어오는 바람의 나라 같기도 하고 
공간의 편액이라도 되듯 획을 지어가며 날아가는 철새들의 거처 같기도 하다. 

겨울 철새인 기러기들이 정교한 몸짓으로 날아가고 있다. 
작은 날개로 먼 거리를 이동하기 위하여 
서로에게 힘을 나누고 보태주며 함께 하는 모습들이 눈물겹다. 
떠돌아다니며 사는 것도 외로울진대 어찌 추운 곳만을 찾아다니는 것일까? 
가물거리다가 결국 사라져 버린다. 
일순 가슴이 먹먹해 온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그 표현할 수 없는 가벼움이 
마치 내 인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다가도 갑자기 적요하여 뒤돌아보면 아무런 흔적 없는…. 

마니산. 산의 정기가 모여 있다는 계단로나 유명한 단군로가 아닌 
이름도 없는 작은 산길로 들어선다. 
강화에 있는 지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알게 된 이 산길은 
동네 사람들이나 다니는 길이라 거의 언제나 사람이 없어 적막하다. 
나무들만이 지닌 향기가 훅 코로 스며든다. 
길게 심호흡을 해본다. 
이 맑고 청랑한 기운이 저 안 폐부 깊숙이 들어가 어둡고 탁한 것들을 
다 소쇄시켰으면 하는 마음으로 깊고 넓게 호흡한다. 

사람의 발자국만으로 만들어진 산길, 
이런 길을 걷노라면 고단하고 지친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인가? 
무한의 시간들이라 하여 그냥 지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미소와 한숨 그리고 셀 수 없는 
체념과 기쁨은 길을 단단하게 돋아주지 않았겠는가? 
줄기차게 내리는 소낙비는 이 길을 지나 계곡으로 흘러들었을 것이고 
함박눈은 겨우 내내 포근한 이불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바람과 꽃들은 길에게 속삭였을 것이고 
낙엽들은 길과 하나 되어 여기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어쩌면 길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혹은 삶의 미묘한 단추 하나를 끌러 내보이는 
치밀하고 촘촘한 역사서일지도 모른다. 

무덤이 나타난다. 
길 바로 옆이다. 
한 많은 사람의 무덤은 길가에 자리해준다는 말을 어디에선가 읽었다. 
한이란 결국 소외를 일컬음인가? 
그래서 죽어서라도 사람의 시선을 받을 수 있다면 
덜 외로울 것이란 배려 탓인가? 
그리하여 당신도 외로운 삶을 살아서 이렇게 길가에 자리하고 있는가? 

관 속에 누워있는 죽은 사람을 생각해 보다가 
슬며시 그 관속에 나를 뉘어본다. 
차디차게 식은 몸, 묶어지는 몸. 관속에 뉘어지는 몸, 어두움, 못질. 
더 어두워진 땅 속…. 
외로울까? 
생각의 답이 나오질 않아서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한참이나 무덤 주위를 서성인다. 
산자의 기억을 위한 존 재거나 산자를 위한 위로의 행위로 존재함이 아니겠는가? 
미래의 내 무덤에게 말해준다. 

갈잎 나무들 사이에서 드물게 소나무 한 그루 서있다. 
기골이 장대하다. 근육질의 멋진 남성 같기도 하다. 
오래 산 나무들은 하나같이 남성적이다. 
하늘을 향해 박차고 올라가는 선의 흐름이 여느 소나무와는 좀 다르다. 
마음이 설렌다. 
걸음을 빠르게 해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가만가만 목피를 만져보다가(일종의 전희다) 품에 안는다. 
내가 기대는지 혹은 내가 안기는지도 모르겠다. 
나무를 안아보라. 바라보는 나무와 안아보는 나무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사람들과의 스킨십 못지않게 나무와도 교감을 이룰 수 있다. 
모든 나무를 다 안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특별하게 마음에 와 닿는 나무를 안아보게 된 것은 
작년 봄 ‘조안 말루프’라는 여인의 나무에 대한 사랑의 기록을 읽은 후이다. 
나무를 정말 사랑하는 그녀는 생물학 선생이면서 
생물학만이 아닌 열정과 사랑을 가르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나무를 안아주라고 이야기한다. 
나무에 열정과 사랑이 있는가? 
혹은 나무를 안은 행위 자체에 열정과 사랑이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열정과 사랑은 
나무를 안는 반복된 순간들 속에서 발현되는 
창조적 모티브인가?
나는 결심했다. 안아보자! 

어쩌면 내가 이렇게 홀로 산길을 걷는 행위도 
잘생긴 나무를 만났을 때 안아보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무를 안고 있는 사람의 그림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무 안기를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나무들에게 내 마음의 속삭임을 들려주기도 한다. 
우리 세 번째다. 너도 기억하겠지. 
사람들에게 너를 생각하며 말했다.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고, 
아주 잘생겼다고, 
너를 이리 바라보니 반갑고 홀로 있을 때면 
네가 생각나니 우리는 연애하는 사이라고. 

사람의 동맥은 하나이지만 그 동맥이 신체를 향하여 뻗어 나갈 때 
모세 혈관의 단계까지 이르면 무려 10억 개의 분지가 형성된다고 한다. 
어디 몸만 그러랴, 
몸보다 훨씬 더 섬세하게 대응되는 주체로서 마음을 해부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갈래들을 세볼 수 있다면 모세혈관의 수와 비슷하지 않을까. 
가령 사랑을 하나의 굵은 동맥으로 본다면 
사랑이라는 동맥에서 파생되는 
숱한 생각과 느낌들은 그 얼마나 다채로운가 말이다. 

사랑의 줄기 중 하나인 연애를 백과사전은 소극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적 기초 위에 꽃피는 남녀 간의 자연스러운 애정”이라고. 
아니, 나무를 안아보라. 아마도 연애에 대한 개념은 이렇게 달라질 것이다. 
“모든 대상들의 기초 위에 꽃피는 자연스러운 애정”으로. 

나무라고 하여 성품이 없을까? 
활엽수의 넉넉함은 없더라도 
소나무는 날카로운 성정답게 생존 의식이 강해서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아주 힘겹게 숲을 일구어 내곤 한다. 
소나무가 일궈낸 살기 좋아진 숲을 다른 식물들이 넘보기 시작하면 
소나무는 아주 서서히 절벽이나 난간 쪽으로 자리를 옮겨가기 시작한다. 
풍성한 햇빛이 아니면 존재하기 어려운 성정 탓도 있지만 
북적대는 저잣거리가 싫어서 스스로 물러나는지도 모른다. 
늙어가는 것도 비슷한 일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적한 곳을 찾아갈 수 있는 여유로움. 

솔방울 하나가 툭 떨어진다. 
호주머니에 주워 담으며 소나무에게 말한다. 
정표라는 거지? 
솔방울이 단순히 솔방울로 보일 때가 좋을 때인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알고 깨달아 간다는 것은 슬픔을 알아가는 일일 것이다. 
솔방울이 저물어가는 생명의 투혼이라는 것을, 
기억되고자 애쓰는 안타까운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역사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지대한 몸짓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가 좋을지도 모른다. 

편안해 보이는 바위에 앉는다. 
바람이 서늘하다. 배낭에서 보온병을 꺼내 뚜껑에 물을 따른다. 
따뜻한 김이 오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작은 플라스틱 병에서 마른 차 몇 잎 물에 넣는다. 
향기처럼 연한 물을 한 모금 마신다. 
박다(薄茶). 맛없는 차의 이름이면서도 
자신이 만든 차를 겸손히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다. 
그러니 참으로 지금 이 차는 박다이다. 
더불어, 혼자 마시는 차를 이속(離俗)이라 이름했는데 
속세를 떠남보다는 속세의 일을 잠시 접음의 상태이려니 
그 역시 차를 마시는 지금의 나이다. 
돌아가야만 하는. 


길 위에서. (07,1.전북중앙신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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