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새살이 돋아

by 상상이상

끝인 줄 알았습니다.

여자의 외도를 목격하고 돌아서 나오며 내 생에 더 이상 사랑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밤이면 내 귓가에 따뜻한 봄을 불어넣던 입으로

낮에는 그에게 입맞춤하며 사랑을 속삭였을 거잖아요.

그 자리에서 여자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비틀어 숨통을 끊어놓았습니다.

수백 번 수천번.. 온 힘을 다해 목을 졸랐어요.

뺨을 갈기고 바닥에 내동댕이쳐 발로 짓밟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헝클어진 육체에 침을 뱉으며 여자를 벌하고 싶었어. 정말... 그러고 싶었습니다.


악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이유도 묻지 못한 채,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어요.

미친놈.. 병신, 머저리 같은 놈. 이런 일을 당해도 싸지.

겨우 이정도 밖에 안되는 놈이라 모든게 그리된 걸 겁니다.

모두 다 내 탓이지요.

못난 내 탓이지요.

왜 이모양일까...

여자를 향하지 못한 칼날이 나에게 날아들었습니다.

가까운, 그래서 만만한 상대를 찾은 거에요.

제일 만만한.. 그에게는 얼마든 잔인할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그를 찌르고 또 쑤시고...


2019년 겨울,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재하.. 그 흔적을 묻었습니다.

도망.

사랑이 변질되고 있음을 좀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한 죄로,

변한 사랑을 돌이키지 못한 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는 죄로 그렇게 떠났어요.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하고,

안개처럼 흩어질 용기 외에 무엇도 남아있지 않은 껍데기로

유서조차 남기지 못하고 숨었습니다.

산으로, 들로,,,


그림자처럼 낯선 공간, 서슬퍼런 시간을 떠돌았습니다.

초점을 잃고 방황하던 사내는 어디에서도 중력의 끌어당김을 느낄 수 없었지요.

우주를 떠도는 쓰레기처럼 떠밀리며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밖으로 꺼내놓지 못하는 울음에 젖어들었습니다.

흐물흐물해져 끝없이 흘러내리는그를 안아줄 수 없어 더 슬펐습니다.

못난 녀석...

끓는 눈물에 뭉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해버린

사내에게서 냉정하게 등을 돌린 채,

피난 같은 조난 상태에 한참을 머물렀어요.


여자의 바람에 힘없이 떨어져나와 사방으로 흩날리던 민들레

돌고 돌아 다다른 곳은 당진,

사내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유일한 사람들이 사는 곳

그래도

그럼에도

별볼일 하나 없는 생에

별스럽게 고달픈 이번 생에

미련이 남은 미련스런 사내입니다.

1 (3).jpg

5년 전, 여자는 비밀스러웠고 사의 가족들은 영문도 모르고 아들을 잃었지요.

사고를 당했다면 연락이라도 닿았을 텐데

의문의 실종...

살가운 면은 없어도 듬직하게 맏이 역할을 하던 아들의 증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길어지자 불안함이, 그리움이..

원망스런 마음으로 변해갔을 겁니다.

그렇게 잊혀진듯 한 상처는

지워진 듯한 기억은 문득문득 찡하게 아려왔겠지요.


실종신고. 그렇게 기꺼이 이혼을 당했습니다.

여자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에요.

말이 없는 사내를 향해 더 모욕적인 무엇이든 내지르고 싶었을 겁니다.

자는 자신의 실수를 덮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자를 향해 또 한 번 칼을 휘두르는 일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그런 여자를 사랑한 죄로 사내는 무자비한 칼부림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사방을 붉게 적시는 사랑의 기억이, 배신의 흔적이, 절망의 몸부림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사위었습니다.


바짝 말라비틀어진 가슴에서 울음이 솟아오릅니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억눌렸던 그리움과 원망이 터져 나와요.

비워진 가슴에 삶을 향한 욕망이 다시 차오릅니다.

너무도 갑작스럽지만 압도적인 느낌,

불현듯, 이대로 사라질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당당했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움텄어요.

여자가 바라는 대로 이렇게 세상에서 지워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야했습니다.

누구도 원치 않는 목숨이래도,

아무도 관심 없는 목숨이래도 다시 살아야했습니다.

애써 묻어버린 여자의,

마지막까지 잔인했던 미소가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사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유가 불쏘시개가 되어 나는 단호히 생에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다시금 밝아오는 하루는 여느 날과 다름없지만

내 안에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점을 찍고 서로를 이어 선을 긋고 길을 내어 가야할 이유가 없이도 반겨주는 이 없어도

기꺼이 삶을 짊어지고 나아갑니다.

어제의 그것과는 너무도 달라요.

먹고 싶은게 떠오릅니다.

따뜻한 물에 씻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누군가와 말을 섞이고 싶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맛있는 것을 찾아 먹고 오물을 쏟아내는 삶.


외로움이 문을 열고 다가옵니다.

너무도 외로워 견딜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철저히 혼자될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랍게 느껴졌어요.

덩그러니 벽을 보고 누워 남자를 위로해 봅니다.

차디찬 시멘트 벽이 살에 닿는 느낌,

이것이 내게 남은 삶 인가 싶어 불안이 몰려옵니다.

두려웠어요.

다시 산다는 게,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게...

간절히 원하는 그것이 너무도 절실해 더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살아라.'

바람이 어루만집니다.

햇살이 토닥입니다.

그렇게 사내는 당신에게로 도착한겁니다.

살아야 할 명확한 이유를 찾게 된 겁니다.

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를 갖게 된 겁니다.

웃게 된 거에요.


당신에게 가기 위해,

당신을 만나기 위해,

몹시도 아팠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런 이유였다면

당신을 만나기 위해 겪어야 했던 과정들이라면

나는 다시 한번 죽음을 각오합니다.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당신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기꺼이

몇번이라도

그렇게라도 당신을 찾고 싶다고 말입니다.

화, 목, 일 연재
이전 04화청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