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

사자일까, 구원일까.

by 상상이상

집 앞 공터에는 5일장이 섰어.

장날 저녁이면 어지러진 장터를 치우곤 커다란 솥 한가득 닭계장을 끓여 동네 식사를 했어.

뱀집, 연탄집, 생선집, 찐빵집, 문구사, 학교 서사네 그리고 우리집.. 젊은 과수댁

일곱집이 챙겨온 반찬으로 조촐한 잔치상이 차려지고

남자 어른들이 올라앉은 평상 위는 밥이 술로 술은 노름으로 노름은 다툼으로 이어지곤 했지.

여자 어른들은 자기 남자 흉을 보면서도 상이 빌새라 음식을 나르고 빈그릇을 치우며 수발을 들어.

아이들은 주변에 널린 장애물들을 놀잇감 삼아 뗏구정물이 줄줄 흐를 때 가지 헐떡거리며 뛰놀다

돈을 잃은 아빠 하나가 술상을 엎으면 시키지 않아도 이제 집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구나를 알고 흩어져.


흙벽은 비밀을 감추기에는 너무 가벼웠어.

재병이 엄마, 오늘 반찬이 별론지 밥상 위를 헤매다 쨍 하고 던져지는 숫가락,

지연이 아빠, 얼큰하게 취해 들어와 밤새 늘어놓는 신세한탄,

야심한 밤, 하루의 고단함을 녹여내는 어른들만의 놀이,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조금만 경계를 늦추면 들키고 말지.

아이들은 잠든 척 이불을 뒤집어 쓰곤 비밀스런 이야기를 들으며 호기심을 키웠어.


동그랗게 공터를 중심으로 똬리를 틀고 앉은 일곱집.

집에 화장실이 있는 집이 하나도 없었어.

너도나도 사용하는 4칸짜리 공공화장실은 늘 더럽고 냄새났어.

화장실 문은 위 아래로 꽤 넓은 틈이 있었는데

누군가 볼일을 보러 들어가면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 눈동자가 틈새로 굴러다녔어.

비명과 뜀박질, 고약한 냄새에 희미하게 섞인 어른의 흔적들...


한가로운 주말 저녁 늦은 밤까지 화투판이 벌어지는 날이면

아이들은 한집에 모여 TV를 보다 여기저기 섞여 잠들곤 했어.

일찌감치 손턴 아빠들, 마누라 성화에 못이긴척 따라나온 아빠들은

잠든 아이를 들춰업고 집으로 데려갔지만

화투판에 상대가 없어질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엄마를 기다리는 나는

부쩍 자란 딸을 혼자 힘으로 업을 기운이 남아있지 않은 엄마와 사는 나는

스스로 눈뜬 아침에서야 집으로 돌아가

술에 취해 잠든 엄마와 함께 먹을 쌀죽을 끓여 아침을 먹곤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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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유난스럽던 겨울, 그날도 엄마는 뱀집에 모여 화투판을 벌였어.

몇살쯤이었는지 희미하지만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주섬주섬 나만을 챙겨 나와

숨을 쉴 때 마다 하얗게 얼어붙던 차가운 공기는 선명하게 기억해.

뒤엉켜 잠들었던 아이들이 하나 둘 부모님에게 안겨 집으로 돌아가고

낳아준 사람의 기억에서 까맣게 지워진 아이 몇만 남았을거야.


그냥.. 잠든 몸뚱아리 위에서 뭔가 움찔거리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

낯선 움직임에 부스스 실눈을 뜨고 상황을 파악했어.

까만 시골의 밤 실눈 사이로 무엇도 보지 못했지만

비릿한 생선냄새가 났어.

입술이 닿았을 때 발가락 끝이 멀리 부비댄것을 보면

생선집 막내는 아니야. 그 아인 나보다 작았으니까...

그럼 둘째, 아니면 큰 오빠...

잠결이고 어린 나이었지만

놀라거나 소리를 질러 잠에서 깬걸 상대에게 들켜선 안된다고 생각했어.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에 불과한 남자아이.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 아이는 몽정 비슷한 꿈을 꾸는 중이었는지도 몰라.

옷을 입은 채 위에서,

내 볼록한 배 위에서 작은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어.

대단히 무례하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납작 엎드린 가자미마냥 내게 밀착해왔어.

어찌할줄 모르는 아랫도리를 무작정 비벼댔어.

아팠어.

몸에도 마음에도 지워지지 않는 빨간 상채기가 새겨졌어.


티 내지 않았지만 경직된 나를 느꼈을까?

내가 알고 있었다는 걸 그 아이도 알았을까?

모른척 했지만 다들 알고 있는건 아닐까?


난 그냥 그게 남자짓이란 걸 알았던 것 같아.

겨우 찬기운을 막아내는 얇은 종이가 겹겹이 붙은 나무문 틈으로 새어나오던

어른들의 힘겨운 몸짓, 성난듯한 숨소리, 거친 마찰음...

아직 어린 내가 상상해서는 안될 어른들의 이야기..

애무와 삽입, 절정으로 이어지지 못할

단순한 호기심으로 허무하게 끝나버릴 돌발행동이었겠지만

분명 그건 내게 하면 안 되는, 나쁜 짓이었어.

분명 그날 나는 지울 수 없는, 나쁜 꿈을꿨어.


잠든 척 했어.

죽은 척 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몰라.

그래. 몰랐어.

기분 나쁘긴 했지만 뭔지, 내게 무슨 일이 있어난건지 잘 몰랐어.

그땐 정말 그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끔찍했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

엄마에게 조차 말을 꺼낼 수 없었어.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김치다라에 들어가 나와 같이 목욕을 하던 자그마한 내 친구가

지난 밤에 나를 상대로 재미없는 놀이를 했다고..

꿈인 것 같기도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해야 했을까?

그랬다면 나는 지금과 달랐을까?


이유없이 죄인이 된 것 같았어.

나이를 먹을수록 빌어먹을 그 기억만은 선명해지더라.

어려서,

몰라서,

그랬겠지.. 그러려니..

그럴 수도 있지.. 가 안됐어.

용을 써도 지워지지 않아, 각색도 편집도 불가한..

어쩌면 꿈이었을지도 모를 하룻밤이

끝도 없이 부풀어올라

결국 나를 삼켜버린거야.


잠결에도 선명하게 들었어.

'미안해.'

분명 그건

놀이도,

실수도,

꿈도, 아니었던거야.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지는 기억때문에

상처는 점점 더 도드라졌어.

비틀어진 몸뚱아리에 비틀린 생각이 들이찼어.

나도 술에 취한 엄마처럼

매일 밤 남자를 그리던 엄마처럼

혼자 애달픈 울음을 뱉던 엄마처럼


이제 막 봉긋해지기 시작한 가슴으로

솜털 같은 몸을 부비며

신음했던 건 아닐까

기꺼이 맞이했던 건 아닐까

내 몸을 타고 놀던 아이의 몽정처럼

훔쳐 듣고 상상하던 것들이 범람하여

나도 모르는 새 흘러넘친 것은 아닐까...

파아란 아이 ...

파랗게 질려버린 아이 ...


그 날,

그 곳에서

난 여자로 태어난거야.

지워내고 싶은 남자를 미치도록 갈구하는


이런 걸 머피의 법칙이라고 하는걸까?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할까?

인생에 무례한 남자만 등장하는 거지같은 기분 알아?

별 뜻 없이

잠깐만 스쳐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사람들.


스스로에 대해 '온전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 같아.

오랜 시간 길가에 버려진 유리 깨진 자동차처럼

누구라도 날 함부로 대할 수 밖에,

그러니 누구도 믿어서는 안된다고

내가 온전하지 못해 그런거라고

내가 그래서 그런거라고

다 그렇다고.


나는 잘 자랐어.

웃는 얼굴이 예쁘단 소리를 많이 들었지.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도

사람들은 눈을 감고 입꼬리를 올려 잔뜩 찌그러진 내 얼굴을 보곤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들 해.

그날 이후로 난 웃어본 기억이 별로 없는데 말야.


그냥,

그렇게 찡그리고 있으면 편해.

무슨 일 있냐고

어디 아프냐고 묻지 않으니까.

삐딱해서 까딱하면 무너져버릴 나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니까.

나에게 무심할 수 있으니까.


당신과 같은 사람을..

만나 본적도, 상상해 본적도 없어.

다시 어린 앨리스가 된 나는 당신에게 시선을 빼앗겨 여행을 시작해.

토끼굴 속으로 굴러떨어져 당신이란 나라에 닿게 된거야.

멈추지 않고 계속 걷다보면 결국 당신에게 도착하게 될거라는 믿음이 싹터.

당신과 함께 있으면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 물을 필요가 없었어.

내가 어디로 가고 싶든 어디를 가든 그 길에서 당신이 기다리니까.


이런 내가,

이런 상황에서 내가,

사랑이라니...


미친걸까?

고양이가 내게 소리치는 게 들려.


"틀림없이 미쳤을 걸. 제정신이면 여기 왔겠니?"


외진 골목 작은 카페,

동네 어르신들이 가끔 찾아 메뉴에도 없는 음료를 주문하면

메뉴에도 없는 음료를 어찌저찌 만들어 내놓는 참으로 이상한 곳이지.

늦은 밤 골목길을 비추는 유일한 불빛,

내 놀이터는 가끔 길 잃은 사람들이 의도치 않게 머물다 가곤 해.

너도 그렇게 이곳에 왔잖아. 기억하니?


네 친구는 여느 사람들처럼 문을 열고 머리만 내민 채 확신없는 표정으로

'커피 포장 되나요?'하고 물었어.

손바닥만한 작은 간판이 카페의 정체를 설명하기에 불충분했던거지.

난 그 애매한 느낌이 좋아서 불빛도 없는 간판에 의지해 매일 가게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는 바보야.

네 표현에 따르면 '똥멍충이'지. 아직도 가끔 난,

네가 외계인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똥멍충이와 외계인' 꽤 그럴싸하지 않아?


포장된 커피를 받아들고 네 친구는 한참을 서서 카페를 둘러봤어.

"여기서 마시고 가도 될까요?" 편의점을 찾아 헤매다 여기까지 왔는데

둘러보니 친구녀석이 이곳을 좋아할 것 같다고 했어.

테이크아웃 잔이지만 어차피 다른 손님이라곤 없을 것 같아서 그러시라 했어.

친구는 구석 자리를 잡고 전화를 했고 그렇게 네가 온거야.

쭈뼛거리며 빼꼼 머리부터 들어온 너.


그렇게 너는 친구와 커피를 마시곤 유유히 사라졌어.

외딴 골목을 지나다 우연히

길을 잃고 지쳐 잠시 쉬어가려고

그렇게 두번은 본적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봄볕이 따뜻한 거리로 미련없이 돌아서 사라졌어.

나만 지나간 계절에 덩그러니 남겨두고 떠난 듯 했어.


그런데 다시 돌아온거야.

까만 밤,

마음둘 곳 만큼이나 갈곳도 없던 나는

썰렁한 카페에 멍하니 앉아있었던 것 같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돈통에 얼마 안되는 잔돈을 털어갈 좀도둑 뿐일테니

오면 얼마든 내어주리라.

그럼 이 지루한 놀이도 끝이 나려나.

늘 같은 길에서 길을 찾지 못해 서성이는 삶을

거두어줄 누군가를 기다렸는지도 몰라.


그런데 네가 들어온거야.

무심한 표정으로 눈동자에 나를 담고

미처 돈통에 담지 못한 마음을 훔쳤어.

처음 본 그날,

이미 찰랑이는 얼굴로.



후로 매일을,

창가에 앉아 한모금씩 커피를 나눠마시며

조심스레 나를 쫓는 네 시선은

커피향에 묻어나는 에티오피아의 햇살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따사로이 나를 비추는 듯 했어.


그때는 몰랐어.

오늘 너의 시선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무엇으로 피어날지..



화,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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